연주 현씨문중과 해평 윤씨문증의 인연고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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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현광수(newpackco@hanmail.net)작성일2023-11-15조회수922 | |
파일첨부 판서공 묘소사진.hwp | |
고려世臣(세신) 沙月(사월) 玄玉亮(옥자,량자) 7 세조가 조선이 건국되자 경북 예천군 지보면 낙동강변인 원학동에 은거하여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고, '학성정'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며 노년을 보내시다 별세하시니 명당인 묘지도 여기에 있습니다. 퇴계선생도 선대의 학문을 칭송한 기록이 있지만, 예천문중은 후일 정자와 서고가 화제로 소실되면서 쇠락하게 됩니다. 일제시대 예천군 풍양면 동래 정씨 집성촌인 우망리의 "영신의숙" 한문교사였던 玄永華(현영화(1891-1969) 조부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로서 1874년 연주 현씨 문중과 海平(해평)윤씨 문중 사이에 선대의 인연이 있기로 살펴보도록 합니다. 尹門도 이전엔 한미하다 尹斗壽(윤두수,1533-1601)와 尹根壽(윤근수,1537-1616)가 영의정과 정1품 재상에 올라 집안이 일어났는데, 부모는 아버지 군자감정 '윤변'과 어머니는 부사직(무관) 玄允明(현윤명)의 여식입니다. 현씨 부인이 두 아들을 훌륭히 교육하여 출세하게 되는데, 위로 전처소생인 아들 둘의 됨됨이는 이 형제만 못합니다. 당시 해평 尹門은 득세한 가문으로, 1574년(선조7) 윤근수가 경상도 嶺白(영백), 즉 영남관찰사로 부임 시에, 어머니는 아들의 외가사정을 말하며, 감사에게 예천의 7세조 묘소에 들러, 외가조상에 대한 성묘를 간곡히 부탁했다. "친정이 비록 곤궁하나, 대구도호부를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하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예를 올리거라!" 윤두수, 윤근수 형제는 효심이 깊기로 유명한데, 1584년 모친별세 때는 형제가 함께 3년 여묘살이를 한 분들입니다. 영남관찰사 윤근수는 외가7세조 묘의 床石에 제물을 차리고 성묘를 한 후 명당으로 소문 난 7세조 묘 주변과 아래에 주인을 모르는 몰래 쓴 봉분들이 많아, 지방관에게 명을 내려 이장하게 지시하고 묘소와 사당을 정비하였다 합니다. 관찰사가 아니라면 미미한 양반가에서 해결이 어려웠던 일을 관찰사가 앞장서서 해당자들이 자진해 처리하게 하니, 1574년 당시 가난하고 미약한 예천의 현씨들에게는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었기에 윤 관찰사를 칭송했다 합니다. 근세에 윤보선(尹潽善, 1897-1990)4대 대통령과 현석호(玄錫虎, 1537-1616)씨가 민주당 시절 대통령과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국회의원으로서 함께 깊은 신뢰와 협조로 정치활동을 하셨던 분들입니다. 두 분이 선대인연을 거울삼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터로 생각되지만, 5,16혁명 후 함께 정계은퇴를 했습니다. 예천 7세조 명당기운이 현석호씨 가계에 들어 동생들도 육군장성과 기업대표, 조합장, 의사, 인물들이 많습니다. 문중과 문중사이에 믿음과 예절을 존중하며 인연을 맺는 것이 얼마나 훈훈한 인연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비단 문중사이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반듯한 예절과 믿음의 처세, 正道(올바름)의 덕목이 필요하겠으며, 삶에서 무엇을 부당하게 바라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의지와 집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 : 소문난 명당주변에 密葬(밀장), 즉 남의 산,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경우가 있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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