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장공파종친회] 中郎將公派事蹟(중랑장공파사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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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연주현씨대종회()작성일2023-02-08조회수15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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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郎將公派事蹟(중랑장공파사적) 8修譜(수보)인 庚辰譜(경진보)를 編修(편수)한지 16餘年(여년), 9修譜(수보)를 編修(편수) 하기엔 다소 이른 감이 있으나 歲月(세월)이 갈수록 한낱 冊欌(책장)속 裝飾品(장식품)으로 轉落(전락)해가는 族譜(족보)를 한글세대들에게도 쉽게 接(접) 할 수 있는 方案(방안)으로 한글 倂記(병기) 및 學歷(학력), 經歷(경력), 褒賞(포상)등을 補完(보완)하고 곧 渡來(도래)할 인터넷 族譜時代(족보시대)를 對備(대비)한 9修譜(수보)인 電子族譜(전자족보)를 DVD化하여 編纂(편찬) 하는 收單(수단)에 參與(참여)하면서,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事蹟(사적)의 撰文(찬문)을 請(청)하기에 先驅者(선구자)의 길을 가신 先祖(선조)님들의 발자취를 採錄(채록) 記述(기술)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族譜(족보)를 編纂(편찬)하는 意義(의의)는 內部(내부)로는 一族(일족)의 血統(혈통)과 家系(가계)를 網羅(망라)하여 先祖(선조)님의 閱歷(열역)과 個人(개인)의 來歷(내력)을 昭詳(소상)하게 記錄(기록)하고 뛰어난 先祖님의 功德(공덕)을 後孫(후손)들에게 傳(전)하므로서 偉大(위대)한 祖上(조상)의 後裔(후예)임을 矜持(긍지)로 後孫(후손)들 間(간)에 團結(단결)하고 相扶相助(상부상조)하는 한편 祖上(조상)님께 부끄럽지 않는 出藍(출람)의 子孫(자손)이 되도록 銘心(명심)하는데 그 뜻이 있다 하겠고, 外部(외부)로는 歷史學界(역사학계)에서 朝鮮(조선) 轉換期(전환기)에 先導的(선도적)이고 肯定的(긍정적)인 活動(활동)으로 韓國近代化(한국근대화)에 貢獻(공헌)했던 人物(인물)들에 對(대)한 論題(논제)의 中心(중심)에 川寧玄氏(천녕현씨) 後孫(후손)들 상당수가 包含(포함) 된 것에 注目(주목)하여 1705년에 編纂(편찬)된 川寧派譜(천녕파보)와 샛말 先塋(선영)내 碑文(비문) 京畿道(경기도) 地方文化歷史記錄書(지방문화역사기록서)등을 硏究(연구) 分析(분석)한 論文集(논문집)(1998년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 발간)에서 보듯이 한 집안의 族譜(족보)도 實錄(실록)에 比肩(비견)되는 文化遺産(문화유산)으로 評價(평가) 된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文化遺産(문화유산)인 延州玄氏(연주현씨) 大同譜 (대동보)도 1747년에 編纂(편찬)한 丁卯譜(정묘보)가 1修譜(수보)입니다만 이보다 42년 앞선 1705년에 編纂(편찬)된 川寧派譜(천녕파보)가 玄門(현문)의 最古(최고)의 族譜(족보)인 것은 進取的(진취적)이었던 先祖(선조)님들의 앞선 記錄文化(기록문화)가 오늘에 傳家之寶(전가지보)임을 立證(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延州玄氏(연주현씨)의 始祖(시조)이신 門下侍郞平章事(문화시랑 평장사) 諱(휘)覃胤(담윤)公은 延山君(연산군) 封君地(봉군지)인 延州(연주)를 本貫(본관)으로 定(정)하고 世系(세계)가 始作(시작)되었지만 後孫(후손)들이 벼슬길을 따라 移住(이주)한 世居地名(세거지명)을 使用(사용) 16餘(여) 本(본)으로 分籍(분적)돤 것을 玄氏(현씨)는 諱(휘)覃胤(담윤)公(공)을 始祖(시조)로 모시는 同祖同根(동조동근)의 後孫(후손)임을 共知(공지)하면서 本貫(본관)을 延州(연주)로 統一(통일)하여 延州玄氏大同譜(연주현씨대동보)가 8修譜(수보)인 庚辰譜(경진보)까지 編纂(편찬)되었으나 우리門中(문중)에서는 6/7修譜(수보)에 一部(일부) 家系(가계)에서 收單(수단)에 參與(참여)하였을 뿐, 全体門中(전체문중)이 參與(참여)한 것은 8修譜(수보)인 庚辰譜(경진보)가 唯一(유일)하다. 川寧玄氏(천녕현씨)의 中始祖(중시조)는 驪州牧使(여주목사) 退任(퇴임) 後(후) 川寧縣(천녕현)에 定住(정주) 하시면서 本貫(본관)을 川寧(천녕)이라 定(정)하고 川寧玄氏(천녕현씨)의 始祖(시조)가 되신 9世(세)諱(휘)守(수)公(공) 이시나 墓所(묘소)가 失傳(실전)되었고 餘他(여타) 記錄(기록)도 滅失(멸실)되다 보니 後孫(후손)들이 千枝一根(천지일근)으로 蕃盛(번성)의 母胎(모태)가 된 掌隸院判決事(장례원판결사) 14世(세)諱(휘)壽謙(수겸)公(공)을 實在(실재) 中始祖(중시조)로 모시는게 妥當(타당)하다고 思料(사료)됩니다. 公(공)은 配位(배위)이신 淑夫人(숙부인) 安東金氏(안동김씨)슬하에 5兄弟(형제) (諱(휘)武(무), 諱(휘)龍(용), 諱(휘)雀(작), 諱(휘)虎(호), 諱(휘)黃(황))을 두셨다. 長男(장남) 光國原從功臣(광국원종공신) 15世(세)諱(휘)武(무)公(공)의 家系(가계)에서는 初期(초기)에는 醫科(의과)및 算員(산원)에서 中後期(중후기)엔 譯科(역과)에서 國家(국가)의 棟樑才(동량재)가 輩出(배출)되어 官僚(관료), 譯官(역관), 地方守令(지방수령)으로 成長(성장)하였고, 諱(휘)武(무)公의 3男(남) 16世(세)諱(휘)夢祥(몽상)系(계)에서는 20世 諱(휘)悌綱(제강)公이 御醫(어의)로 임금(英祖6년)을 診療(진료)했다는 記錄(기록)과 22世(세)諱 (휘)必采(필채)公은 內醫(내의)로 임금(정조24년)을 診察(진찰) 및 處方(처방) 했다는 記錄(기록)이 있다. 諱(휘)武(무)公의 4男(남) 16世(세)諱(휘)得洪(득홍) 系(계)에서는 23世(세)諱(휘)錫聞(석문)(세례명:錫文카롤로)公이 韓國天主敎(한국천주교) 初期(초기) 信者(신자)이자 殉敎者(순교자)로서 1839年 己亥敎難(기해교난)에 朝鮮敎區(조선교구) 2代(대) 엥베로主敎(주교)와 宣敎師(선교사)및 敎友(교우), 公(공)의家族(가족)등이 殉敎(순교)하는 渦中(와중)에 生前(생전)에 主敎(주교)께서 당부하신 朝鮮天主敎(조선천주교)의 運命(운명)과 당신이 記錄(기록)하시던 己亥日記(기해일기)의 完成(완성)을 遂行(수행)키 위해 산속에 3年餘(여) 隱居(은거)하면서 敎友(교우)들을 추스르고 己亥日記(기해일기)도 完成(완성)하였으나, 公도 1846年 丙午敎難(병오교난)에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軍門梟首刑(군문효수형)으로 殉敎(순교)하였다. 己亥日記(기해일기)는 1925年 로마敎皇廳(교황청)이 殉敎者(순교자) 諡福(시복) 審査(심사)時 韓國天主敎(한국천주교)敎人(교인) 79位(위)福者(복자)의 諡福(시복) 節次(절차)에 決定的(결정적) 證據資料(증거자료)가 되었고, 公(공)도 1984年 5月 聖人品(성인품)에 올랐다. 次男(차남) 參判(참판) 15世諱(휘)龍(용)의 家系(가계)에서는 公(공)의 長男(장남)인 計士別堤(계사별제) 16世諱(휘)仁祥(인상)의 子(자) 17世 諱(휘)琢(탁), 諱(휘)璨(찬), 諱(휘)頊(욱), 3兄弟(형제)가 譯科(역과)에 入格(입격)한 以來(이래) 100餘名(여명)의 譯官(역관)이 輩出(배출)되면서 朝鮮朝(조선조)에 代表的(대표적)인 譯官(역관)집안으로 長安(장안)에 膾炙(회자)되었고, 特(특)히 22世諱(휘)啓根(계근), 23世諱(휘)厚(후), 24世諱(휘)在明(재명), 25세諱(휘)鎰(일), 4代(대)가 堂上譯官(당상역관)인 從1品(종일품)崇祿大夫(승록대부)에 올라 諱(휘)啓根(계근)公의 祖父(조부)이신 20世諱(휘)尙夏(상하)公이 工曹參尉(공조참위)에, 父親(부친)이신 21世諱(휘)深(심)公은 漢城府左尹(한성부좌윤)兼(겸)五衛都摠管(오위도총관)에 追贈(추증)되었다, 또한 4代(대)가 145年동안 써 내려온 22世諱(휘)啓根(계근)의 東巖日記(동암일기:1744-1798), 23世諱(휘)厚(후)의 喜卨日記(희설일기:1798-1818), 24世諱(휘)在德(재덕)의 弇山日記(엄산일기:1819-1833), 25世諱(휘)鐸(탁)의 石樊日記(석번일기:1833-1887)는 한갓 民草(민초)들의 記錄物(기록물)로 貶毁(폄훼)할 수도 있겠지만 當時(당시) 4代의 地位(지위)가 堂上譯官(당상역관)과 內醫正(내의정)인 高位官僚(고위관료) 身分(신분)임을 勘案(감안)할 때 後孫(후손)된 慾心(욕심)에 國家(국가)의 文化財級(문화재급) 遺物(유물)로 評價(평가) 받아야 된다고 所望(소망)하지만, 哀惜(애석)하게도 後孫(후손)들이 管理不實(관리부실)로 因(인)하여 石樊日記(석번일기)만 傳來(전래)되고 있다. 延州玄氏(연주현씨)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濟州入鄕祖(제주입향조)이신 明月萬戶(명월만호) 17世諱(휘)禹成(우성)公은 15世諱(휘)龍(용)公의 3男이며 都事(도사)를 歷任(역임)하신 16世諱(휘)文祥(문상)公의 次男(차남)으로 1618년 京畿道別內面(경기도별내면)샛말에서 誕生(탄생), 1660年(顯宗(현종) 1年)에 入鄕(입향)하셨고, 1696年5月8日 逝去(서거)하신후 自經農場(자경농장)인 巨牛臺(거우대: 濟州市二徒洞(제주시이도동))에 安葬(안장)하였다. 그 後(후) 寶城郡守(보성군수)를 歷任(역임)한 公(공)의子(자) 18世諱(휘)石喆(석철)公을 비롯하여 後孫(후손)들 墳墓(분묘) 30餘基(여기)가 들어서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濟州先塋(제주선영)으로 300餘年(여년)을 이어왔으나, 2008年(년) 住宅開發地區(주택개발지구)로 收用(수용)되자 “명당머루”(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1327번지)로 移裝(이장)하면서 散在(산재)되었던 後孫(후손)의 墳墓(분묘)를 包含(포함) 100餘基(여기)의 先塋(선영)을 造成(조성)하였으며, 後孫(후손)들은 歷代(역대) 世居地(세거지)인 濟州市 朝天邑 咸德里(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居住(거주)하고 있다. 參男(삼남) 右尹(우윤) 15世諱(휘)雀(작)公은 世居地(세거지)인 天安(천안)의 先塋(선영)에 安葬(안장)되셨고, 後孫(후손)들도 現地(현지)에 居住(거주)하면서 延州玄氏(연주현씨) 壬戌譜(임술보) 收單(수단)에도 參與(참여)하였으나 生業(생업)따라 大部分(대부분) 出鄕(출향)하면서 庚辰譜(경진보) 編修(편수)에는 天安(천안) 判官公(판관공)系로 吸收(흡수) 編纂(편찬) 된 것으로 傳(전)해지고 있다. 四男(사남) 副司直(부사직) 15世諱(휘)虎(호)公系(계)에서는 1705年 譯科嘉善(역과가선) 18世諱(휘)德潤(덕윤)公이 倭學譯科(왜학역과)에 入格(입격)한 以來(이래) 倭學(왜학) 堂上譯官(당상역관) 40餘名(여명)이 輩出(배출)되었고, 日本國(일본국) 對馬島(대마도)行(행) 譯官使(역관사)에 諱(휘)德潤(덕윤)公이 派遣(파견)이후 9回(회) 朝鮮通信使(조선통신사)行(행)에 5回(회)에 걸처 堂上譯官(당상역관)인 後孫(후손)들이 派遣(파견)된 것으로 記錄(기록)되어 있다. 諱(휘)虎(호)公의 世系(세계)에서는 倭政當時(왜정당시) 漆原郡守(칠원군수)이시던 24世(세)諱(휘)暎運(영운)公(공)이 失傳(실전)되었던 延州玄氏(연주현씨) 贊成公派(찬성공파) 中始祖(중시조)이자 孝寧大君(효령대군)의 孫胥(손서)이신 9世(세)贊成公(찬성공)諱(휘)碩圭(석규)公(공)의 墳墓(분묘)를 찾은 後(후) 贊成公系(찬성공계) 後孫(후손)들과의 緣通(연통)이 어렵다는 事由(사유)로 墳墓(분묘)의 整備(정비), 伐草(벌초), 歲祀(세사) 等(등)을 公(공)의 兄弟(형제)들이 主導(주도)하여 奉祀(봉사)하게 되면서, 1924年(倭政(왜정)15年) 延州玄氏(연주현씨) 甲子譜(갑자보) 編修(편수)時(시) 贊成公(찬성공)系(계) 14世(세)孫(손)이 无後(무후)인 것에 着眼(착안),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15世諱(휘)虎(호)公을 贊成公派(찬성공파) 14世 諱(휘)洙(수)公(공)의 白骨養子(백골양자)로 入籍(입적) 編修(편수)하여 90餘年(여년)이 지난 後孫(후손)代(대)까지 贊成公派(찬성공파)의 系譜(계보)를 이어온 奉祀孫(봉사손)임을 自處(자처)해 왔다. 歲月(세월)이 흘러 壬戌譜(임술보:1982年)와 庚辰譜(경진보:2000年) 編修(편수)時(시) 贊成公派(찬성공파) 宗孫(종손)系(계)와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諱(휘)虎(호)公(공)의 直系孫(직계손)들이 收單(수단)에 參與(참여)하면서 甲子譜(갑자보:1924年5修譜)와, 丁酉譜(정유보:1957年6修譜)의 系譜(계보) 誤記(오기)에 對(대)한 訂正(정정) 請願(청원)을 하였으나, 大宗會(대종회) 族譜編纂委員會(족보편찬위원회)의 名分(명분)없는 放任(방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9修譜(수보)인 電子族譜(전자족보) 編修(편수)가 系譜(계보) 訂正(정정)의 臨界点(임계점)이라는 切迫(절박)한 覺悟(각오)로 贊成公派(찬성공파) 宗孫(종손)系와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諱(휘)虎(호)公系(계) 小門中(소문중)(서울, 홍천, 밀양)에서 提出(제출)한 系譜 誤記訂正(계보오기정정) 請願(청원)이 大宗會(대종회) 族譜編纂委員會(족보편찬위원회) 第5次(차) 會議(회의)(2015年10月22日)에 上程(상정) 滿場一致(만장일치)로 妥當(타당)하다고 議決(의결),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諱(휘)虎(호)公(공)系(계)는 贊成公派(찬성공파)系譜(계보)에서 分離(분리)할 것을 議決(의결)하였고, 理事會(이사회)와 定期總會(정기총회)에 上程(상정), 追認(추인)을 받고 終決(종결)하였다. 一連(일련)의 過程(과정)에서 諱(휘)虎(호)公의 後孫(후손)들이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로의 復籍(복적) 請願(청원)을 받고 大宗會(대종회) 仲裁下(중재하)에 兩(양) 宗親會(종친회) 代表會議(대표회의)에서 當宗親會(당종친회)가 復籍(복적) 收用條件(수용조건)으로 첫째, 別內面(별내면) 先塋(선영)에서 破舊墳(파구분)한 29基(기)를 松界里(송계리) 先塋(선영)으로 移葬(이장) 復元(복원)하고 둘째, 宗財(종재)도 當宗親會(당종친회) 保有(보유) 基準(기준)에 맞춰 出捐(출연) 合算(합산)할 것을 提議(제의)하였으나, 諸般事由(제반사유)로 受用(수용)이 어려우니 復籍(복적)案(안)은 撤回(철회)하고, 宗員(종원)들이 聚合(취합)한 意見(의견)대로 中朗將副司直公派(중랑장부사직공파)로 獨立系派(독립계파) 構成(구성)을 闡明(천명)한 바 있다, 五男(오남) 諱(휘)黃(황)公은 夭折(요절)한 것으로 傳(전)해지고 있다. 收單을 聚合[취합] 하면서 壬戌譜(임술보:1982年), 庚辰譜(경진보:2000年), 編修(편수)에 參與(참여)했던 京鄕各地(경향각지)의 宗員(종원)님들과의 疏通路(소통로)가 斷絶(단절)된 어려움과, 在美(재미) 宗員(종원)들인 27世諱(휘)栒(순) 牧師(목사) 後孫(후손)들과의 不通(불통)의 아쉬움, 限定(한정)된 紙面(지면)으로 中樞(중추) 25世諱(휘)鐸(탁)公의 石樊日記(석번일기) 解說書(해설서)를 紹介(소개)치 못하는 哀惜(애석)함이 있고, 비록 派(파)는 分離(분리)됐지만 同根(동근)의 子孫(자손)들인 15世 諱(휘)虎(호)公의 後孫(후손)인 譯科嘉善(역과가선) 18世諱(휘)德潤(덕윤)公의 韓日(한일) 間(간)의 外交(외교), 貿易(무역), 通信使(통신사) 行(행)에서 남기신 足跡(족적), 小說家 (소설가)이자 東亞日報社會部長(동아일보사회부장)이셨던 25世諱(휘)鎭健(진건)公(공)이 連累(연루)된 日章旗抹殺事件(일장기말살사건)의 陳狀(진상), 韓國(한국)大衆藝術界(대중예술계)의 巨木(거목)이셨던 26世 諱(휘)東柱(동주)(예명:玄仁(현인))公의 演藝界(연예계) 裏面史(이면사) 等 險難(험난)한 世波(세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오로지 忠(충), 孝(효), 節(절), 義(의)의 길을 가셨던 先代(선대)의 삶을 經驗(경험)이 日淺(일천)한 短智(단지)의 筆舌(필설)로 담아내려 했던 것이 過慾(과욕)의 所致(소치)였음을 自認(자인)하면서, 至難(지난)했던 朝鮮朝(조선조) 外交史(외교사)에서 實務(실무)의 主軸(주축)으로 榮辱(영욕)의 國家大事(국가대사)에 獻身(헌신)하셨던 譯官(역관)들의 哀歡(애환)의 記錄(기록)들과, 歷史(역사)의 轉換期(전환기)에 韓國近代化(한국근대화)에 先導的(선도적)으로 參與(참여)했던 先祖(선조)님들의 功績(공적)들을 採錄(채록), 補完(보완)하여 玄門(현문)의 자랑스러운 事蹟(사적)으로 完成(완성)시키는 것은 後孫(후손)들의 몫임을 素望(소망)하면서 不備(불비)의 事蹟(사적)을 마칩니다. 丁酉年(정유년) 正月(정월) 中郎將公派(중랑장공파) 28世孫(세손) 丞燦(승찬) 謹書(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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