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양의막파종친] 연주현씨 제주도 친족회 양의막파 묘지 성역화 사업의 발자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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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관리자(hyunc033@hanmail.net)작성일2024-03-24조회수7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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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현씨 제주도 친족회 양의막파 묘지 성역화 사업의 발자취 오랜 세월 속에 살아오면서 가난과 굶주림의 역경은 지난날 누구나 거쳐온 삶이라고나 할까. 1998년 11월 가을 추수가 막 끝날 무렵이었다. 연주현씨 양의막파 친족회 총회가 성산읍 신천리 수묘손인 진오친족님 집에서 개최되었다. 제주도의원 선거에서 양의막파 현성익 친족이 당선된 것을 축하해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의원으로 당선되었으니, 쓰러져가는 양의막파 친족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하명도 있었다. 양의막파의 자손으로서 도리를 다하라는 친족님들의 한결같은 절체절명의 염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명무실한 친족회에 회장직을 맡아야만 했다. 연주현씨 양의막파 친족으로는 국회의원 6선을 역임한 현오봉의원님, 국선 심사위원으로 서예가 소암 현중화선생님, 삼성그룹에서 성장의 주역인 현명관회장님 등등… 이토록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재들을 함께한 친족회였다. 한때는 선조님들이 남겨 놓은 유산이 있어서 어려움을 모르고, 친족회를 운영해 왔다. 유산인 묘 좌전을 관리해 오다가 불행한 경제 파탄으로 묘 좌전이 전부 타인에게 양도되고 말았다. 묘지가 있는 진입로마저 없어져 버린 현실 앞에 친족회는 앞길이 캄캄하였다. 하지만, 성익회장님은 희망을 갖고 용기를 내었다. 승만 총무와 함께 고민하면서 앞으로 개발이 착수된 후에는 진입로 매입이 불가능할 것 같아, 묘지 진입로부터 우선 해결해야 했다. 1999년 선영의 묘지 진입로 토지 소유주를 수소문하여, 서울에 사는 토지주와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 토지교환 및 일부 매매형식으로 진입로를 개설하고, 분할 측량 이전 등기를 모두 마치게 되었다. 친족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친족님들이 자손의 도리를 한번 해보자는데, 힘을 모았다. 제대로 관리를 못 해 가시넝쿨이 우거진 양의막 할머님의 묘지를 정리하고, 사전이모루에 모셔진 할아버님을 양의막 할머님이 자리에 함께 모시자는 것이었다. 할아버님이 모셔진 ‘사전이모루’보다 할머님을 모신 ‘양의막’ 묘터가 더 명당이라고 해서, 친족회에서는 오래전부터 할머님의 모셔진 양의막이라는 호칭을 사용해 왔다. 그래서, 떳떳한 양의막의 자손임을 후세에 넘겨주고자 굳은 다짐을 하면서 묘지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업비는 전무한 상태였다. 고심 끝에 성금 모금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양의막파 친족 상황을 파악하고, 선조님 묘지 성역화 사업 방법에 대한 친족님들의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성익회장님은 혼자 상경하여 서울 신라호텔 사장으로 재직 중인 명관 친족님을 찾아뵙고, 자초지종 사연을 말씀드리면서 친족회 명예회장직 자리를 수락받았다. 대종회 승종회장님과 진규수석부회장님, 기일부회장님께도 자문을 구했고, 현오봉의원의 차남인 왕수 제주장학회이사장 등 많은 관심 있는 양의막파 친족님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양의막묘지성역화사업의 취지를 알렸다. 성익회장님은 자비를 들여가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거주하는 제주도 친족회장님을 만났다. 만나고 보니 친족회장은 법환동 출신으로 양의막파였다. 갖고 간 허벅술로 제주를 올리고 친족회 묘지를 참배하였다. 오사카에서도 친족회를 방문하며 4박5일 동안 묘지 성역화 사업에 대한 취지를 알리니, 친족님들도 동조의 뜻과 함께 많은 성원 주셔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2003년 4월 입도조 목사공 후손 중 실묘 된 선조님 6위의 제단을 만들어 묘비를 건립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후손의 도리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는 명관 명예 회장님이 큰 도움과 친족님들이 성원 그리고 나석 선생님과 익주 친족님의 묘비 근서 제공 등으로 1차 사업을 잘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2006년 음력 7월 1일 새벽 2시 한자 형자(漢亨) 할아버님을 양의막 임씨 할머님 곁으로 모시는 이장을 하게 된다. 캄캄한 밤, 수풀을 헤치며 묘지 앞에서 제례를 지내고, 축을 고하고, 파묘를 시작했다. 그러나 3시간 동안 땅을 파도 흔적이 없어 당황하고 있을 때, 하얀 백회 가루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형 할아버님의 유골을 모시고, 양의막 할머님 묘지로 와서 봉분을 파묘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합장하여 하나의 봉분을 만들었다. 주위에 잔디 벽을 둘러 성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할아버님이 모셔진 묘소가 바로 속칭 양의막으로 그 후손들에게 오랜 숙원사업인 소망이 이루어졌다. 이날을 기리기 위해 한자 형자 할아버님과 할머님 묘비 건립과 묘소 앞에는 자연제주 이석창 사장이 기증한 2백 년생 배롱나무도 심고, 울타리 축성과 주변 조경도 마무리했다. 3m x 2,5m 자연석에 ‘양의막 친족회 성역화 사업 헌성비’를 세우게 되었다. 헌성비 제막식에는 대종회 진규부회장님을 비롯한 기일부회장님, 일본 동경에서 규전고문님, 도 친족회 치방명예회장님, 화진고문님, 병찬고문님, 임종회장님, 용진신상파회장님, 양의막파에서는 성익회장님을 비롯한 명관 명예회장님, 규전고문님, 등 원근 각지에서 친족님들이 참석하여 격려와 축하를 받았다. 헌성비에는 명관명예회장님이 1천만 원을 쾌척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고, 친족님들이 십시일반으로 적극적인 참여와 참된 자손의 도리를 하겠다는 귀한 정성들이 모여진 결과이었다. 만약에 그 당시에 성익회장님이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 양의막 친족회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하늘이 우리 영의막파 후손들의 손을 잡아 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재정을 자립할 방법이 없으니, 좌전을 독지가에게 장기적으로 임대하여 일정 기간이 지나면 토지 내에 시설된 모든 지상권을 친족회에 무상으로 환수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게 됐다. 그 당시 성익회장님이 장기적인 안목이 없었다면 오늘의 현실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어느덧 묘 좌전이 임대 기간이 만료됐는데도 임차료를 납부하지 않아서, 부득이 소송을 하게 되었다. 명도 소송에 의해 후임 회장인 고 헌식 회장이 토지를 반환하기 위해서 고전분투하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 버렸다. 당시 부회장이었던, 제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우선 시급한 문제가 소송을 빨리 마무리하고, 토지와 하우스를 인수하여 양의막 친족회가 관리하는 일이었다. 몇 개월 동안 법원과 변호사와 임차인을 만나 소통한 결과, 드디어 2023, 5, 23. 관리 운영에 관한 법적인 문제를 모두 정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당시 양의막 총무로 수고했던 승구 친족이 임차하여 운영하고 있다. 친족회 자산으로는 시설하우스(천혜향 재배) 3천 평을 갖게 되어, 매년 임대료 2천5백만 원의 소득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연주현씨 양의막파 친족회가 걸어 온 굴곡진 오랜 세월 속에 어려움을 함께해 온 명관회장님을 비롯한 성익회장님, 승만, 승구 총무와 친족님들 한 분 한 분의 값진 희생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석 선생님과 익주회장님, 수언 선생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까지 ‘양의막파 묘지 성역화 사업이 발자취’를 뒤돌아보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친족님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양의막 친족회가 존속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연주현씨 제주도 양의막파 친족회는 숭조애족의 종훈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며 창대해 나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23. 08. 15.
연주현씨 제주도 친족회 양의막파 회장 영식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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