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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종친회] 연주현씨 역사 인물고
작성자연주현씨대종회()작성일2023-02-08조회수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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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 현 담윤(玄 覃允)

 

연주현씨(延州玄氏)는 BC 2300여 년전 고조선의 서북방 지역인 요동반도 서북방 지금의 선양지방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연합체인 부족국가로 현도국(玄都國)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다가 천재지변과 지금의 중국인 한족(漢族)과의 전란속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정남(正南방향으로 이동하여 산동성(山東省곡부지방으로 이주한 씨족(중국 현씨)과 동남방으로 이주하여 생활 해온 씨족은 고구려가 망한 후 및 발해의 생몰의 역사와 금나라가 옛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면서 무주공산의 시기에는 압록강 유역에서 거주하다가 고려의 개국과 국토의 경계를 마무리 하던 고려조 초기에 이주 명령에 의하여 현씨최씨강씨 등 6성의 씨족들이 청천강 유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어 우리들의 조상은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지역에서 거주하게 되었다시조공(始祖公이신 담윤(覃允)공은 서기 1120년경 출생하시어 고려17대 의종, 18대 명종 조에 출사(出仕하시어 1174년 명종 4년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1174 1176. 9)을 장남인 덕수공(德秀公)과 함께 연주성을 방어하고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헌(貢獻)을 세우시고 연산군(延山君)을 받으시고 그 후 현재의 총리급 벼슬인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를 역임하셨으며당시로서는 장수(長壽)하신 60대 후반 영면(永眠)에 들었으며 경헌공(景憲公)이란 시호를 받으시고 지금 북한 원자력 연구소가 있는 평안북도 영변군 관동에 묘소가 있다.

 

1. 연주현씨 종가(宗家)의 계보(系譜)

1세 담윤(覃允– 2세 덕수(德秀 병부상서성산부원군) - 3세 원렬(元烈 태복윤) - 4세 경여(敬輿 전객령) - 5세 금(嶔 좌찬성) - 6세 치룡(致龍 도첨의시사) - 7세 옥량(玉亮 판전의시사) - 8세 용무(龍武 사재감 부정) - 9세 규(珪 이조참의) - 10세 득원(得元星州牧使)

 

*** 10세 득원(得元 장남성주목사 청송(묘소영천 보현산)

득형(得亨 차남남해현령 예천(묘소예천 지보면)

득리(得利 : 3전주판관 천안(묘소천안 풍세면

득정(得貞 : 4진사 금산서산(묘소불명)

 

 

2. 역사 인물고 현 옥량(玉亮 판전의시사): 세거지 경북 예천)

 

고려 30대 충정왕과 31대 공민왕조 시기에 도첨의시사(都僉議寺事)를 지낸 6세 치룡(致龍)공의 3형제의 장남으로 는 砂月천품이 영특하고 용모가 단정하시고 도량이 넓었으며 공민왕조1374년 전시문과에 알성급제하여 벼슬이 판전의시사 (判典儀寺事)(조선조예조판서)까지 올랐으며조선조 태조(이성계)는 개국 초기 공을 예의판서와 판전의시사를 거듭 임명하였으나 1392년 공양왕 때 무너지는 고려조를 보며 모두 불응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금서(琴書)와 시주(詩酒)로 회포를 달랬으며강가의 맑은 모래와 밝은 달을 보며 향리 이름을 사월동(砂月洞)으로 고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은 고려조의 세신(世臣)으로 남기를 원하였으며후손들이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용납하였다의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한탄(恨歎)스럽기만 하다.

 

3. 역사 인물고 현득원(玄得元: : 세거지경북 청송)

 

태종조(太宗朝고부군수(古阜郡守)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신 9세조 규()공의 자식 4형제중 장남인 득원(得元)공은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절이 탁월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세종조에 입조(入朝)하여 집현전과 육조(六曹)에서 학문과 실무를 익혀 내외직을 순환 근무한 후 승차(陞差)하며 단종조(端宗朝)에 들어 외직(外職)중 고위 관직인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성주목사(星州牧使)로 1454년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위무하며 지내던 중 소문에 단종(端宗)께서 선위(禪位)를 당하였다는 소식에 통곡하며 집현전에서 동문수학하던 제위에게 선왕의 고명을 잊었느냐고 항의 서간을 보내고 집무실 난간에 관인(官印)과 관복을 벗어놓고 큰 아들 보손만 데리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어버렸다이른바 국내에 망명인 셈인데 그 이유는 조선조 초기의 율법은 고려조에서 내려오던 경국대전의 율법에 의한 반역죄(역모)를 받게 되는 현실을 감안하여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가면 구족이 멸족(滅族당하던 시절의 현상을 감안하여 끝내 피신의 수단으로 미상의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최종으로 경북 영천 보현산록 깊이 변성명(變姓名)으로 훈장으로 변신하며 삶을 살다가 가셨다집안에서 내려온 전설에 의하면 1470년대에 별세 하실 때 사후(死後) 100년 전후 큰 전쟁이 나면 [임진왜란(壬辰倭亂예견], 보현산을 넘어가 청송(靑松)으로 식솔(食率)들은 옮겨 살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또한 보현산록에 계시는 목사공의 묘소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소나무가 서북향으로 휘어져 있는 모양을 보면 태어난 고향인 예천과 서울을 향해 절하고 있는 듯 한 모양새가 아련함을 느낀다연주 현문의 장자(長子가문의 후손으로서 가세(家勢)가 넉넉하지 못하고 자손이 늘지 않고 명망있는 자손이 없는 현상이 종가(宗家)의 면목(面目)을 세우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게 생각 한다

 

星州牧使公 15世後孫 鎭東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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