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玄家)탐구

연주현씨 시조유래

시조님 유래와 연주현씨 조형물
시조유래

시조(始祖)는 오늘의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옛 이름인 연주(延州) 출신으로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대장군(大將軍)으로 나라에 크게 공헌하신 문하시랑공(門下侍郞公) 현담윤(玄覃㣧)이시다.


용맹(勇猛)·지덕(智德)을 겸비하신 공(公)은 연주성(延州城)의 도령(都領)으로서 고려 명종(明宗)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평정하심으로서 중신(重臣)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시어 연산군(延山君)에 봉군(封君) 되셨다.


고려사(高麗史)는 공(公)의 위대한 충절과 공훈에 대하여 “나라의 거성(巨星)으로서 기리 빛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시조의 세 아들도 국가에 큰 공을 세워 장남 덕수(德秀)는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차남 이후(利厚)는 광성군(廣城君), 삼남 덕유(德裕)는 회원군(檜原君)으로 봉(封)해지셨고, 그 자손들이 고려와 조선시대 및 근 현대를 거치면서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현씨는 우둔한 사람이 없다.”는 현무둔재(玄無鈍才)의 전통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현씨(玄氏)는 연주(延州)를 단일 본관(本貫)으로 천년에 가까운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연주현씨 조형물 작품설명

연주현씨 휘장로고를 조형화한 작품으로 중심의 큰 ◯(원)은 한 뿌리 일근一根 즉 단일본과 우주의 중심을 뜻하며 3개의 작은◯(원)은 천지인天地人 삼원三元과 그 조화를 상징, 삼천리 강산 고을마다 자손만대 지혜와 기백으로 번창하고 조화를 이루어 무궁한 도약을 기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주현씨의 유래<시조(始祖) 현담윤(玄覃胤)>
연주(延州)는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고호(高號)이며, 영변군은 영주(迎州)와 무주(撫州)의 합명(合名)이다. 영주는 본래 고려 때의 밀운군(密雲郡)인데 670년(광종 21) 연주(延州)로 고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으며 995년(성종 14) 방어사(防 使)를 두었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연산부로 승격되고 1413년(조선 태종 13) 도호부로 개편되었다.


무주는 원래 고려의 운남군(雲南郡)인데 995년 무주방어사라 하였다가 공민왕 때 태주(泰州)로 이속되었고, 1391년(공양왕 3) 감무(監務)를 둔 후 태종(太宗) 때 무산현(撫山縣)이 되었다. 1419년(세종 11) 연산과 무산을 합하여 영변으로 개칭하고 세조(世祖) 때 연주(延州)를 나누어 운산군(雲山郡)에 속하게 하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 영변군으로 개칭되었다.


현씨(玄氏)의 시조 현담윤(玄覃胤)은 본래 평안도(平安道) 연주(延州) 출신으로 고려(高麗)의 의종조(毅宗祖)에 장군(將軍)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현담윤(玄覃胤)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시조의 봉군지명(封君地名)인 연주(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현씨(玄氏)의 본관(本貫)은 연주를 비롯하여, 성주(星州)·창원(昌原)·순천(順天) 등 무려 106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현존(現存)하는 본관은 30여 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시랑공(侍郞公) 현담윤(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1747년(영조 23) 정묘보(丁卯譜)를 편수(編修) 할 때 연주 현씨(延州玄氏)로 단일화(單一化) 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임술보(壬戌譜) 때도 문중(門中)의 합의(合議)에 따라 본관을 연주로 통일(統一)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 담윤(覃胤)의 3 형제 중 덕수(德秀)와 이후(利厚)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반적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훈공을 세워 맏아들 덕수가 내시지후(內侍祗候)와 안남 부사(安南府使)를 거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廉使)를 역임한 후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팔거군(八 君)에 봉해졌다가 수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으로 이봉(移封)되어 그의 후손들이 성주 현씨(星州玄氏)로 분적(分籍) 하였다.


둘째 이후(利厚)는 경상도 안렴사(慶尙道安廉使)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고, 1186년(명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덕유(德裕)는 시조의 셋째 아들로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을 거쳐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후 대사공(大司空)에 이르러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창원 현씨(昌原玄氏)로 분관(分貫)하였으며, 성산부원군 덕수(德秀)의 둘째 아들 원미는 영동정(令同正)으로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순천 현씨(順天玄氏)로 분관(分貫)하였다.


고려조에서 무훈(武勳)으로 명성을 떨쳤던 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9세손 규(珪)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지내고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이조 정랑(吏曺正郞)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득원(得元)은 어릴 때부터 기절(氣節)이 탁월하고 효우(孝友) 도한 돈독하였는데, 세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54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민정을 보살폈으나 이듬해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보손(寶孫)과 같이 영천(永川) 묵방동(默坊洞)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종신토록 질의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한편 빈(彬)의 아들 익수(翼洙)는 가세(家勢)가 빈궁했으나 청백(淸白)하여 처사(處士)로 일컬어졌으며 지릉 참봉(知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노부모(老父母)의 봉양을 위해 나가지 않고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좌참찬(左參贊) 효생(孝生)의 아들인 석규(錫圭)가 한양(漢陽)에 과거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천정(濟川亭)에서 여러 왕자(王子)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있는데 과거를 보려고 몰려든 선비중에 한 선비를 가리키며 불러 오도록 했다.


세조(世祖)는 그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접대하면서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는 좌중(座中)을 둘러보며 "누가 이중에서 처녀 딸을 둔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먼 길을 오느라고 의관(衣冠)이 해어지고 형용(形容)은 초췌한 그 선비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효령에게 처녀 딸이 있어 지금 혼인(婚姻)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하니, 세조(世祖)는 "좋은 사위를 구하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가문(家門)이 적합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조는 "옛날부터 큰 인물은 초야(草野)에서 많이 나왔으니 혼인(婚姻)을 정하기로 하시지요" 하며 권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그 선비의 집안을 알아보니 영남(嶺南)에서 문명(文名)을 덜치고 있는 가문이어서 사위를 삼았는데, 그 선비가 바로 석규(錫圭)였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밖에도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손곱힌 상벽(尙壁)이 「관봉문답(冠峰問答)」·「관봉유고(冠峰遺稿)」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학자(學者) 약호(若昊),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덕윤(德潤)·재덕(在德) 등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유명한 병근(炳瑾)과 익철(益哲)이 대(代)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朝(韩)系 玄氏의 유래와 中国 汉族 현씨성(연주현씨 시조/유래)
1. 朝(韩)系 玄氏의 유래

朝(韩)系 玄氏는 侍郞公 《玄覃胤》(기원12세기중엽)을 시조로 모신다.
朝(韩)系 玄氏는 《延州》를 통일本貫으로 하는데 延州란 조선 평안북도 宁边의 옛 지명이다.



侍郞公 玄覃胤은 원래 平安道 延州 출신으로서 조실 부모하고 가세가 넉넉치 못하였다.八、九세 때부터 몸집이 웅장하시고 지혜와 용맹이 출중하셨으며 성장 하시면서 경서를 널리 보시고 춘추좌전과 손자, 오자병서를 즐기셔 다 읽으신 후에 탄식하며 하시는 말씀이 《나라가 다사다난한 이때에 남아 대장부가 어찌 집에서 글만 읽고 있겠느냐?》라고 하시면서 그때부터 분연히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부지런히 익히시였다.


延州 剑阁山 깊은 골짜기는 나무숲이 우겨져서 밤에는 사람들이 다니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侍郞公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公이 어렸을 때 하루는 혼자서 이 剑阁山에 들어 가게 되였는데 산속에서 날이 저물어 그만 캄캄한 밤이 되였다.


이때 시커멓게 생긴 산귀신이 나타나 《현장군님께서 오셨다》하고 놀라면서 저절로 횃불을 들고 公의 앞길을 인도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때에 이미 장차 高麗大将军으로 될 公의 담략과 기백은 귀신도 겁을 낼 정도로 대단하였다는 뜻이리라.


公이19세가 되시도록 아직 장가 드시지 못했는데 북방의 羯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소란을 피워댔다. 이에 격분한 公은 자체로 의병을 일으키여 시끄러운 외적을 멀리 쫓아버리고 국경을 평정하셨다. 高麗毅宗은 이를 가상히 여기여 특별히 상을 내리고 公을 延山府使로 제수하였으며 친히 명문거족의 규수를 택하여 결혼하게 주선하였으니 그때로부터 公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玄氏姓이 처음으로 高麗관적에 오르게 된것이다.


中国 송나라에서는 女真의 란이 일어나 高麗에 지원병을 청구하게 되였다. 公은 援兵大将军으로 임명되시여 지원병을 이끄시고 中国에 출전하시여 大功을 세우고 개선하셨다. 그리하여 송나라 황제는 公에게 큰상을 내렸으며 또 특별히 사신을 高麗에 보내와서 公의 공덕을 치하하였고 벼슬을 크게 올려줄것을 高麗임금에게 극구 권유하였다. 그후 公의 벼슬은 여러번 올랐다.


公의 이상의 사적은 《高麗名臣录》에도 기록되여 있다.) 그러나 公께서는 왕실정국의 혼란함을 혐오하시여 모든 벼슬을 사퇴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公께서는 옥녀봉 밑에 별장을 한채 축조하시고 그대로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고자 하셨다.


그런데 高麗明宗四年 (기원1174년)에 서경류수 趙位寵이 역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키여 巴岭이북을 누리떼처럼 휩쓸어 나가니 40여개성의 성주들이 모두 임금을 배반하고 분분히 반역군에게 투항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公께서는 변란의 소식을 들으시고 결연히 대의를 선택하시여 延州성을 지키는 장군을 설득하여 얼마 안되는 군대를 점검하여 가지고 두 아들과 함께 선뜻이 반역군 토벌에 나서시였다. 이에 趙位寵은 크게 겁을 먹고 유혹과 위협수단을 써 가면서 公을 매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公은 단연히 거절하고 반역군과 완강히 싸워서 4전4승함으로써 趙位寵의 기세를 여지없이 꺾어 놓았다. 公의 높으신 덕망과 출중한 智勇에 탄복한 이웃의 금나라 임금은 스스로 자기의 장수와 지원병을 파견하여 公을 도와주게 되였다. 公은 두 아들과 함께 금나라 지원병과 협동작전하여 끝내는 반역군 괴수 趙位寵을 잡아 참살함으로써 나라를 구해내고 또 한번 大功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公의 벼슬은 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延山君에 봉해졌으며 두 아들도 모두 높은 벼슬을 제수받았다. (公의 이 사적은 《高麗史》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公이 세상을 떠나 장례때의 일이다. 상여가 五里亭이라는 곳에 이르니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 나오기에 상여를 멈추고 영령앞에 간단히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례를 올리게 되였다. 례식이 끝난후 상여를 다시 들려고 하였는데 상여는 땅에 뿌리 내린듯 움직이지 않는다. 《이 곳에 묻히시고 싶은 뜻이 있으신가?》하고 누가 말한즉 그때에야 비로서 상여가 움직이니 결국 그곳에 묘소를 쓰게 되였다.


그후에 玄氏의 후손들은 많은 노력을 거쳐 끝내는 公의 묘소를 찾아 내였으며 玄覃胤을 始祖로 받들고, 시조의 封君地名인 延州를 本貫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玄氏는 高麗때에 주로 무훈으로 특출하였고 李朝때에는 2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玄氏의 本貫은 연주를 비롯하여 星州、昌原、順天등 무려 106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현존하는 본관은 30여 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侍郞公 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世倨地名에 불과하므로 1747년(영조 23) 丁卯譜를 編修 할때 延州玄氏로 단일화 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壬戌譜 때도 문중의 합의에 따라 本貫을 延州로 통일하였다.


1915년 한국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씨(玄氏)는 남한(南漢)에 총 88,8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체 남한인구의 약 0.2%를 차지한다.


2. 中国 汉族 玄氏姓에 대한 초보적 탐구

朝(韩)系 玄氏에서는 기원1174년에 高麗明宗으로부터 門下侍郞平章事 벼슬을 제수받고 延山君에 봉해진 玄覃胤을 시조로 모신다.


그의 先系에 대해서는 지금 확실하게 고증할 문헌자료를 찾지 못했지만 그 어느 때엔가 中国으로부터 건너가 高麗에 귀화된 家系임은 의심할 바 없다. 왜냐하면 朝鲜(韩)민족의 역사에서는 高麗文宗(기원1047년) 때부터 백성들도 비로서 姓氏를 쓸수있게 되였는데 玄氏姓은 高麗에서 발원한 姓氏가 아니기 때문이다.


朝(韩)系 玄氏의 시조 玄覃胤의 탄생년도는 대략 기원1130년 좌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의 선조가 中国으로부터 高麗땅에 건너가 정착하게된 시간이 늦어서 기원1130년 전이 되는것이다.


그 당시 中国대륙은 南宋(1127~1279)초기가 되며 高麗와 인접해있는 북방 지구에서는 辽(907~1125)와 金(1115~1234)이 한창 교체되는 시기가 되므로 中国 사처에서 전란이 그칠사이 없는 아주 혼란한 시기였다.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中国 山东 泰安지구에 유구한 세대를 내려오며 생활하여 온 汉族 玄氏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北宋(960~1127) 후기부터 끊임없는 전란 가운데서 점점 우심해지는 北方胡人들의 약탈을 피하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륙속 정든 고향을 뜨게 되였다.


朝(韩)系 玄氏의 시조 玄覃胤의 선조들도 아마 그 시기에 혼란한 中国을 떠나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북방의 高麗에로 건너갔을 것이다.


그 후기에 몽골란이 일어나면서 中国 山东의 汉族의 玄氏는 대규모적인 이동이 있었다. 마을을 떠난 대부분 사람들이 새로 정착한곳은 지금의 河北省 迁安市 서북쪽으로 약 10여리 떨어진 곳이었는데 마을이름을 《大伭庄》이라고 하였다. 그후 大伭庄은 전반 迁安지구는 물론하고 전반 冀东一带의 玄氏宗源地로 되였다. 지금도 河北省 迁安市 大伭庄村 西北쪽에 가면 玄氏祖坟遗址이 있다.


1887년에 大伭庄村의 일부 汉族 玄氏 宗亲들은 迁安市 城东 二十华里되는 곳에 이주 하였는데 새마을 이름을 《伭新庄》이라고 하였다. 伭新庄村의 汉族 玄氏 宗亲들은 이미 五十余代의 《玄氏宗谱》를 이어오고 있다.


朝(韩)系 玄氏가 시조 玄覃胤으로부터 이제 겨우 三十余代 밖에 안되는데 비추어 보면 中国에서의 자기의 뿌리를 찾자면 먼저 이 河北省 迁安市 伭新庄村의 五十余代 《玄氏宗谱》를 찾아서 연구하는것이 가장 가능한 길일 것이다.(필자의 有生之年에 기회가 차려지면 꼭 한번 시도해 보겠지만 如意치 못할때에는 뜻이있는 玄氏의 후생들한테 부탁하는 바이다.)


中国에서 汉族의 玄氏는 극히 희소한 姓氏이다. 그렇게 된 원인은 주요하게 中国历史상 두개 조대나 걸치면서 避讳를 당했기 때문이다. 소위의 避讳란 皇帝이름에 있는 글자를 일반 老百姓으로서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옛 규정이다.


첫 번 째는 기원 960년에 宋朝가 건립되면서 宋太祖 赵匡胤의 부친의 이름이 玄朗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 나라에 통고를 내여 老百姓의 姓氏와 名号에서 일률로 《玄》자를 피하라고 엄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 당시 많은 玄氏들은 핍박에 의하여 할 수 없이 자기성을 元氏로 바꾸게 되였다.


두번째는 기원1662년 清朝 康熙皇帝가 등극하면서 그의 이름이 玄烨라는 이유 때문에 전국의 玄氏姓들은 또 재앙을 당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첫번째 避讳에서 요행으로 보존되었던 玄氏姓들중에서 절대부분은 할 수 없이 또 元氏로 바꾸게 되였으며 일부분은 《玄》자의 마지막 획인 점을 찍지 않은 잔페 《氏》가 되였으며 또 일부분은 《玄》자앞에 새변을 달아 《伭氏、泫氏、眩氏…》가 되였다.


그후 康熙가 끝나고 雍正皇帝가 등극하면서 잔페《氏》는 다시 원래의 玄氏로 회복할수 있었고 《伭氏、泫氏、眩氏...》도 다시 玄氏의 대오에로 돌아올수 있었지만 이미 元氏로 바꿔진 절대부분의 玄氏들은 영원히 다시 玄氏로 돌아올수 없게 되였다.


中国에서 汉族 玄氏姓의 由来를 살펴본다면 여러가지 설이 있기는 한데 그중에서도 비교적 대표성적인 네가지 설만 살펴 보자.
첫번째는 《史记》에 기록된 黄帝의 아들 玄嚣설이다.
두번째는 《世本》에 기록된 黄帝의 신하 玄寿설이다.
세번째는 古玄都설이다. 그 근거로는 《风俗通》에 기록되여 있는 《玄都, 古诸侯国,子孙以国为氏。(현도는 옛날의 한 제후국이였는데 그 나라 자손들은 나라이름을 자기의 성씨로 하였다.)》라는 구절이다. 《中国古代史》에는 《古有玄国, 公元前 651年楚灭玄。(옛날에 현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기원전651년에 초나라가 현나라를 멸망시켰다.)》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력사지명자료를 찾아본데 의하면 그 古玄国이 바로 오늘의 河南省 光山县 西北쪽에 있었다.


네번째는 古泫氏城설이다. 《竹书纪年》에서 찾아보면 《晋烈公元年 (公元前 419年),赵献子城泫氏。(진렬공원년<기원전419년>에 조헌자가 泫氏성을 세웠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과 관련하여 《元和郡县志》泽州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高平县은 《南至州八十里, 本汉泫氏县, 属上党郡, 在泫水之上, 故以为名, 后魏改为玄氏。》(고평현은 남쪽으로 택주까지 팔십리인데 원래는 한나라때의 泫氏현으로서 상당군에 소속되여 있었으며 泫水의 상류에 있었다. 그 연고로 그런 지명을 가지게 되였는데 后魏때에 와서 玄氏로 고쳐졌다.) 력사지명자료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高平县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의 山西省 高平市 城区에 있었다.


이상의 中国 汉族 玄氏姓의 由来에 대한 네가지 설에서 첫번째 설과 두번째 설은 진실성이 극히 희박하다. 黄帝때의 일이라고 하면 지금으로부터 거의 5천년전의 일인데 그때에는 자기의 姓氏를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소부분의 왕공귀족들 뿐이였으며 자식이 부친의 姓氏를 따를수 있다는 규정도 아직 없었다. 그리하여 玄嚣의 직계후손들 가운데서 玄氏姓을 이어가진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炎帝와 黄帝가 모든 中华民族의 始祖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玄嚣나 玄寿를 玄氏姓의 始祖라고 하여도 얼마간 도리가 있겠지만 특정된 단일한 玄氏宗亲의 血统을 이어온 始祖라고 증명하자면 아직 증거가 거의 공백이다.


네번째 설도 아직 진일보 고증해 보아야 할것이다. 《竹书纪年》이나 《元和郡县志》에 기록되여 있는 《泫氏》혹은 《玄氏》는 한 고장의 地名으로 기록되여 있는데 사람들의 姓氏로 동일시 하기에는 무엇인가 좀 모자란다. 이 고장 사람들이 자기의 姓氏도 《泫》氏 혹은 《玄》氏로 하였는가 하는데 대하여서는 아직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오직 세번째 설만은 이유나 증거방면에서 비교적 완전하다. 그러니 中国 汉族 玄氏姓 가운데서 적어서 일맥은 바로 오늘의 河南省 光山县 西北쪽에 있었던 公元前 651年전의 《玄都》라고 부르는 古诸侯国, 즉 《古玄国》에서 기원했다고 단정할수 있다. (끝)
編寫者: 延邊朝鮮族禮儀研究會理事長—玄龍洙(八修大同譜127p/第五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