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玄家)탐구

역사의 인물소개(업적/유적)

연주성 활약(조위총의 난)

고려사절요 12권 중

서경유수병부상서(西京留守兵部尙書)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ㆍ이의방을 토벌하기를 꾀하고, 동북 양계(東北兩界)의 여러 성(城)에 격문을 보내어 소집하기를, “소문을 들으니 서울서는 중방(重房)에서 결의하기를, '근래 북계(北界)의 여러 성에는 대체로 거세고 나쁜 사람들이 많으니 마땅히 가서 토벌해야 한다' 하고, 군사를 이미 크게 동원하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스스로 주륙을 당하겠는가. 마땅히 각각 병마를 규합하여 속히 서경(西京)으로 나오라." 하였다. 이에 절령(岊嶺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40여 성이 다 호응했으나, 유독 연주(延州) 도령(都嶺) 현담윤(玄覃胤)과 그 아들 덕수(德秀)는 주군(州軍)의 장수에게 말하기를, “옛날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였을 때, 모든 성들이 다 항복하였으나 유독 우리 연주만은 의젓이 굳게 지켜서 공적이 왕부(王府)에 기록되었다. 지금 위총이 화난(禍難)의 마음을 속에 숨겨 가지고 군사로 왕명을 거역하니,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진실로 충의를 지녔다면 어찌 차마 그 명령에 좇겠는가." 하고, 드디어 주의 장수와 더불어 궁궐을 향하여 늘어서서 절하고 잇달아 만세를 부르면서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겨울 10월에 위총이 연주에 사람을 보내어 통첩하기를, “지금 북계의 40여 성의 군사들이 이미 여기에 모였다. 유독 너의 성에서만 오지 아니하므로, 장차 정예한 군사를 보내어 죄를 묻고자 한다. 부디 2, 3명의 말을 듣지 말고, 마땅히 말에게 죽을 먹이고 군사를 일으켜 속히 서도(西都 서경(西京))로 나오라." 하였다. 이날 성중에서는 덕수(德秀)를 권행병마대사(權行兵馬臺事)로 추대하였다. 덕수가 주장(州將) 언통(彦通) 등 30여 명을 보내어 서경에서 온 사자를 사로잡아 죽였다. 위총이 또 통첩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군사를 일으킨 것은 장차 북쪽 변경의 여러 성을 구제하려는 것이다. 여러 성의 군사들이 이미 청천강(淸川江)에 도착하였는데 유독 너의 성만 오지 않으니, 장차 군사를 동원하여 쳐서 멸망시키겠다." 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의 인심이 자못 흉흉하여 혹 위총에게 호응하려는 자가 있었다. 덕수가 맹주(孟州 평남 맹산(孟山)) 장리(將吏)의 편지를 거짓으로 만들어 비밀히 성 밖의 촌백성으로 하여금 성중에 던지게 하였는데, 말하기를, “서울[上京]의 군사 10령(領)이 이미 철령(鐵嶺)을 넘어 동계(東界)로부터 장차 서도(西都)를 치게 되었으니, 무릇 주진(州鎭) 가운데 위총에게 잘못 속은 자는 경솔하게 발병(發兵)하여서는 안 된다. 각기 굳게 지키면서 기다리라." 하니, 성중의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 딴 마음이 없었다. 덕수가 주(州)의 부사(副使) 최박문(崔博文), 판관(判官) 안지언(安之彦)ㆍ김공유(金公裕) 등과 더불어 군사를 나누어서 모든 성문을 진치고서 지켰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을 보내어 3군을 거느리고 위총을 치게 하며, 또 내시 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崔均)을 보내어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都指揮使)를 삼아 여러 성에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병마사(兵馬使) 차중규(車仲圭)가 연주(延州)로 가느라고 운반역(雲畔驛)에 이르니, 운주(雲州 평북 운산)의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분대감찰어사(分臺監察御史) 임탁재(林擢才)와 녹사(錄事) 이당취(李唐就) 등이 연주(延州 평북 영변(寧邊))에 이르러 말하기를, “병마사가 이미 죽었으니 우리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인(印)을 품고 와서 귀주(貴州)에 살 길을 찾습니다." 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선지별감장군(宣旨別監將軍) 현이후(玄利厚)로 임시 병마사의 일을 행사하게 하니, 이후는 덕수의 아우이다. 덕수로 임시로 감창사(監倉使)의 일을 맡게 하고, 당취로 이전대로 병마녹사(兵馬錄事)를 삼아 모든 부서를 바꾸며 군사를 엄중히 하여 지켰다. 이날 안북도령(安北都領) 강우문(姜遇文) 등 34성의 도령이 연주에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서울[上京]에서 장차 대군을 발하여 북쪽 변경의 여러 성을 치려고 한다. 여러 성은 실로 죄가 없기 때문에 서경의 조상서(趙尙書)가 우리들을 구제하고자 하여 군마를 불러 모았는데, 유독 귀성(貴城)만이 오지 아니하니 그 뜻이 어떠한가. 만약 딴 생각을 가지고 좇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 일족을 전멸시킬 것이니, 군마를 거느리고 서경으로 나와서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갑오4년 1174 )


2월에 여러 성의 군사들이 다시 연주(延州)를 공격하므로 덕수가 쳐서 패배시켰다.


8월에 영주(寧州 평북 의주(義州))ㆍ연주(延州) 두 고을이 위총에게 붙지 아니하고 굳게 그 성을 지켰다고 하여, 안북호장(安北戶長) 노문유(魯文腴)를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삼고, 현덕수의 아버지 연주도령(延州都領) 담윤(覃胤)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그 고향에 살게 하였다. 덕수를 내시지후(內侍祗候)로 삼고, 안북도령 강우문(姜遇文)ㆍ송자청(宋子淸)ㆍ문신로(文臣老)에게는 벼슬과 상을 차등 있게 주어 모두 서울에 살도록 하였는데, 안북은 처음에는 위총에게 붙었으나 뒤에 배반하였다. (을미5년 1175)



현덕수와 노극청

산원동정(散員同正) 노극청(盧克淸)이 집이 가난하여 집을 팔려고 하였으나 팔리지 않았다. 일이 있어 외군(外郡)에 갔는데 그의 아내가 낭중(郞中) 현덕수(玄德秀)에게 백은(白銀) 12근을 받고 집을 팔았다. 극청이 돌아와 덕수에게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이 집을 살 때에 단지 은 9근만 주었다. 두서너 해 살고 있으면서 더 꾸민 것도 없는데 3근을 더 받는 것이 도리이겠느냐. 이를 돌려 준다." 하니, 덕수가 말하기를, “그대는 능히 의를 지키는데 나만이 홀로 의를 지키지 못하겠느냐." 하면서, 드디어 받지 않았다. 극청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의가 아닌 일은 하지 않았는데 어찌 헐하게 사서 비싸게 팔아 재물을 탐할 수 있으랴. 그대가 만약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즉시 그 집값을 다 돌려 줄 것이니 우리 집을 물러 달라." 하였다. 덕수가 마지 못하여 은 3근을 받고 따라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극청보다 못할 사람인가." 하면서, 드디어 은을 절에 기부하니 이 일을 들은 이가 모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말속(末俗)이 이익만을 다투는 때에 이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을사 15년 1185)



현덕수와 기로회

9월에 평장사로 치사(致仕)한 최당(崔讜)이 졸하였다. 최당은 글을 잘 짓고 중앙과 지방에 관직을 역임하여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명망이 한 시대에 두터웠다. 나이가 노쇠하기 전에 글을 올려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거처하는 재(齋)의 편액을 쌍명재(雙明齋)라 하였다. 아우 선(詵)과 장자목(張自牧)·이준창(李俊昌)·백광신(白光臣)·고영중(高瑩中)·이세장(李世長)·현덕수(玄德秀)․조통(趙通)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한가로이 스스로 즐기며 얼굴을 그려 돌에 새겨 세상에 전하니 당시 사람이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 하였다.(신미7년 1211)



현덕수와 음사(淫祀)

병부상서로 치사(致仕)한 현덕수(玄德秀)가 졸하였다. 덕수는 쇠빛 얼굴에 서골(犀骨)이 있었고, 담략이 있었으며, 의기(意氣)로써 스스로 뽐내고 말과 웃음이 과장되니, 혹 그를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 일찍이 안남도호부사가 되어서는 정사가 청렴하고 밝으니 아전과 백성이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더욱 음사(淫祀)를 미워하니 무당이 그 경내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아전이 여자 무당과 그 남편까지 잡아오니 덕수가 신문하면서 동료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무당은 여자가 아니다.” 하니, 동료가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여자가 아니면 어찌 남편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는데, 덕수가 곧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남자였다. 전부터 무당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술(術)을 핑계로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몰래 부녀에게 간음하였는데, 몸을 더럽힌 자 또한 부끄러워서 감히 남에게 알릴 수 없었으니, 이르는 곳마다 간음한 일이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한 지방이 덕수의 신명(神明)함에 감복하였다. (을해2년1215)


*서골(犀骨) : 관상법(觀相法) 에 ‘伏犀貫頂’이란 골격이 있는데, 이것은 귀인이 될 격이다.
*음사(淫祀) : 정당하지 못한 난잡한 제사로, 무당들이 굿하는 신당(神堂) 등속이다.


출처- 고려사절요 12권 중
저자-김종서·정인지·이선제·신석조·신숙주·김례몽·양성지·이예·김지경·김윤복·이극감·윤기무·박윤정·홍우치·이효장·김효우·김용·한서봉·허익·박팽년·유성원(이상)



가문을 빛낸 선조

(현씨의 유래)

현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문헌에 16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연주. 창원. 성주. 순천 등 4본이 전한다.


그러나 현씨는 모두가 연주 현씨의 분적종이란 것이 통설이며, 근래에 와서는 연주 현씨 단본으로 하고 있다.


현씨의 시조는 고려 명종때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현담윤 이며, 손자 원고(대장군 덕수의 둘째아들)는 순천 현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후손 규는 성주 현씨로 분적 되었다.


둘째 아들인 덕유는 고려 명종 때 금자광록 대부로 회원군에 봉해져 창원 현씨의 시조가 되였다.


현씨는 적은 인구에 주로 고려조에서 무훈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우찬성에까지 올라 명관으로 칭송을 받았던 석규와 학문이 뛰어나 당대에 이름난 성리학자로 손꼽힌 상벽, 약호, 주자학의 대가인 익수시켜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


한말에 와서도 충의의 전통을 이어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시켜 항일 투쟁에 공헌했다. 현씨는 현재 서울, 경기를 비롯한 경상남북도와 충남에 많이 살고 있으며 특히 제주도에는 3천 여 가구가 집단 거주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선조

현덕수:(1215고종2)고려의 장군 담윤의 아들로 어려서 연주분도 장군 김치규에게 박탈되여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고 누차 문과에 실패한 뒤 병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1174년(명종 4)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전령 이북 40여 성이 다 이에 응했으나 도령인 아버지 담윤과 함께 성을 고수, 주인들에 의해 권행병마대사에 추대되어 조위총이 회유차 보낸 사절을 잡아 죽였다.


그후 권감창사가 되어 서경의 군사 1만에게 성이 포위되자 이를 쳐 궤멸시켰고.다시 서울에 진격했다가 패퇴한 서경 군사가 여러 겹으로 포위해 왔으나 이를 대파했다.
이듬해 금나라 세종이 그들의 고군분투상을 전해 듣고 원병을 보내왔으나 이를 사양하여 돌려보내고, 또 다시 성이 포위 공격당했으나 이를 격퇴했다. 그 공으로 아버지 담윤은 장군이 되고. 그는 내시 지후에 이어 안남도호부 부사가 되어 잘 다스렸다.
도관 낭중을 거쳐 이부 낭중에 임명되자 변두리 지방민으로서 과분하다는 간관의 반대로 병부 낭중에 전직 되었으며, 사재 소윤을 거처 신종 때 전중감이 되고 병부상서에 이르러 치사했다.



현 옥량 : 고려 때 파전의 사사를 역임하였다.
현 진 : 고려 때 전적 에 이르렀다.
현 원열 : 고려 충렬왕 때 도첨의 저승을 역임하였다.
현 경여 : 고려에서 전객령을 지냈다.
현 금 : 고려조에 좌찬성을 역임햇다.
현 치용 : 고려 때 도첨의 사사.영의정 등을 역임.
현 용휴 : 조선조에 좌승지를 지냈다.
현 명조 : 용휴의 아들로 조선 때 성균관 진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현 흡 : 조선에서 훈련원 주부를 지냈다.
현 사주 : 조선 때 장사랑을 지냈다.
현 광일 : 조선 때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추증.
현 두규 : 자는 천교, 조선 때 공조참의에 추증.
현 봉점 : 조선 때 직강을 역임.
현 봉태 : 조선 때 전적을 지냈다.
현 광우 : 조선 때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현 익수 : 1766(영조42)~1827(순조27)
조선의 학자. 자는 파향, 호는 회당. 빈의 아들로 가세가 빈궁 하였으나 청백하여 처사로 이름났다.
김이양의 천거로 지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노부모를 위해 나가지 않았고 다시 상신 김이교에 의해 천거 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삼바 천. 반고. 한유. 구양수의 글을 애독, 뒤에는 주자학에 전심했다.



현 석문 : 1799(정조 23)~1846(헌종 12)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교명은 칼로로. 역관 계흠의 아들로 1836년(현종 2) 의주에 가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고, 그후 샤스땅 신부를 도와 전도에 힘써 천주교 한양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로 아내와 누이가 순교, 앵베르 주교의 요청을 받아 (조선 천주교 순교자 열전)의 집필에 착수했고, 이해 8월 앵베르, 샤스땅, 모방 등 세 신부마저 잡혀 죽자 박해를 피해 다니며 낙망한 신자들을 위로,(순교자열전)의 편찬을 위하여 때로는 중국 상해까지 가서 자료를 정리, 3년 만에(기해일기)라는 이름으로 열전을 완성했다.
1845년 (헌종 11)김대건과 함께 상해로 가서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를 안내하고 입국, 다음해 9월 서울에서 피체, 김대건 등에 올랐다.



현 일 : 1807(순조 7)~1876(고종 13)
조선의 문신. 자는 만여, 호는 교정, 지중추부사 재명의 아들. 음보로 연천군수를 거쳐 주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 문에 뛰어났다.



현 병근 : 호는 하죽, 한말에 독립 운동가로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현 익철 : 한말 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였다.



고려사 권제99 열전 제12 현덕수전에서 발췌(拔萃)

(북한국역)

현덕수(玄德秀) 편

현 덕수는 연주(延州) 사람이며 얼굴이 철색이고 수족이 짧으며 담략이 있어서 자기가 의기 있는 체하고 豪言壯談을 잘 하므로 간혹 조소하는 자도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여 나게 총명하였으므로 연주 분도 장군 김치규(延州分道將軍金稚圭)가 그를 보고 기이한 인물로 인정하고 서울로 데려다가 공부를 시켰다. 그는 글을 읽을 때에 대의 파악을 주로 하고 글도 잘 지었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 하고 병으로 고향에 돌아 갔다. 명종 4년에 조 위총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절령 이북이 모두 그 편으로 넘어 갔다.


현덕수가 그의부친인 도령(都嶺) 현 담윤(玄覃胤)과 더불어 자기 고을 군관들에게 말하기를《옛날 거란의 장수 소 손녕(蕭遜寧)이 우리 나라를 침범할 때에 각 고을이 모두 항복하였으나 우리 고을만은 엄연히 고수하여 그 공적이 왕실에 기록되어 있다. 이제 조위총이 악심을 품고 왕의 명령을 거역하니 그의 죄는 천지 간에 용납할 수 없다. 만일 충의를 품은 사람이라면 어찌 참아 그에게 복종할 수 있겠는가?》라고 드디어 군관들과 함께 대궐을 향하여 요배하고 연거퍼 만세를 부르며 성문을 닫고 고수하니 조위총이 사람을 시켜 연주로 편지를 보내여 재촉하기를 《이제 북계(北界) 40여 성(城)의 군대가 이미 이 곳에 모였는데 홀로 너의 성(城) 오지 않으니 앞으로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죄를 물을 터이다. 아예 몇몇 사람의 말에 속지 말고 군비를 갖추고 병력을 동원하여 빨리 서경으로 오라! 고 하였다. 성 중에서는 현덕수를 권행 병마대사(權行兵馬臺事)로 추대 하였는데 현덕수가 군관 언통(彦通)등 30 여 명을 보내여 편지를 가지고 온 자를 잡아 죽였다. 조위총이 또 다시 공문을 보내기를《이제 군대를 동원한 것은 장차 북부 국경의 여러 성(城)을 구제하려는 것이다.


각 성(城)의 병력이 이미 청천강(淸川江)에 집합되었는데 너의 성(城)만이 홀로 오지 않으니 장차 군대를 파견하여 섬멸하려 가겠다.》라고 하니 성중 사람들이 자못 동요하여 지며 어떤 자는 조위총의 편으로 넘어 가려는 자가 있었다. 그래서 현덕수가 맹주(猛州)의 장수와 아전의 명의로 격문을 조작하여 가만히 성 밖 주민을 시켜 그 글을 성 안으로 던지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경군(上京兵) 십 령(領)이 이미 절령을 넘어 동계(東界)로부터 서경을 향하여 진격 중에 있다. 어느 주(州)나 진(鎭)이 든지 조위총에게 속운 자는 경솔히 군대를 동원하지 말고 각기 자기 고을을 굳건히 지키고 관군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리 하여 성중 사람들은 이글을 믿고 딴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현 덕수가 그 고을 부사(副使) 최박문(崔博文)과 판관 안지언(判官安之彦), 김공유(金公裕)들과 더불어 군대를 나누어 여러 성문을 수비하기로 하였다. 병마사 차 중규(車仲圭)가 연주로 오는 길에 운반역(雲畔驛)에 이르러 운주(雲州)사람들에게 살해당하였으므로 분대 감찰어사 임탁재(分臺監 御史林擢材)와 녹사 이당취가 연주로 찾아 와서 말하기를 《병마사가 이미 죽였으니 우리들은 갈 곳이 없다. 우리들을 구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서 고을 사람들이 현덕수의 아우 선지 별감 용호군 장군 현이후(宣旨別監 龍虎軍將軍玄利厚)에게 병마사 직무를 임시 대행하게 하고 현덕수에게 감창사(監倉使)일을 대행하라 하였으며 이 당취에게 종전대로 병마 녹사를 보게 하는 등 각 부서들을 개편하고 수비를 강화하기에 노력하였다.


안북도호 도령 강우문(安北都護都領姜遇文)이 34 성(城) 도령들과 연명으로 연주의 장병과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서울에서 대병력을 동원하여 북부 지방 여러 성(城) 토벌하려 하는데 사실 우리 성(城)들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그런 까닭에 서경의 조상서(趙尙書)가 측은히 여기고 우리들을 구하여 주려고 각 성의 병정이며 군마를 소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 성만이 오지 않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딴 마음을 품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너희들 일족이 몰살 당할 것이니 마땅히 군대를 인솔하고 서경으로 모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운주 낭장 군우(雲州郎將君禹)도 변 맹(邊孟)이란 자에게 편지를 전달하여 출병을 강요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서경의 파견원이 40여 성의 장병과 여러 사찰들의 승병(僧兵)일 만여 명을 인솔하고 당신네 성을 공격하려 하니 신중히 생각하고 빨리 소집에 응하여 오라!》고하였으나 임탁제가 변맹의 머리를 베어 효시(梟示)하였다. 이윽고 서경측 군대가 성을 공격하였으므로 임탁제가 맞받아 격파하였다. 해질 무렵에 서경군이 다시 성 남쪽에 진을 치고 소리질러 이르기를 《동북 여러 성(城)들이 출병한 것은 이 나라를 바로 잡으려는 것인데 너희들만 홀로 응하지 아니 하는 까닭에 공격하려 왔으니 현이후(玄利厚) 형제와 임탁제, 당취 등을 베고 성을 열어 항복하는 자가 있으면 많은 상을 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도륙하겠다.》라고 하였다.


현 덕수가 남문으로부터 나와 공격하였더니 서경군이 드디여 서울을 급히 진격하였다. 그들이 서울 서쪽에 도착하였으나 이 의방(李義方)에게 패배당 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비록 서울에서는 뜻 대로 되지 못 하였으나 연주는 작은 성으로서 오랜 기간 항복치 않으니 이 곳은 그 대로 둘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연주로 달아 와서 몇 겹으로 에워쌌다. 현덕수가 고용지(高勇之)와 당취를 시켜 급격히 돌격하여 적을 대파하였는바 살해, 포로가 막대한 수에 달하였다. 서경군이 또 다시 공격하여 왔으므로 현덕수가 또 출결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고 무수한 병장기를 노획하였다. 이듬 해에 금나라 장수 고라(高羅)가 군대를 인솔하고 연주 지경에 와서 주둔하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떨고 있었다. 고라가 말을 전하기를《우리 황제가 당신네 나라의 여러 고을들(조위총을 말한 것)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으나 홀로 당신네들은 그 편에 붙지 않았으므로 오래 동안 적들의 압박을 받아 형세가 심히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원조하여 주라는 명령을 받고 온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현 담윤은 전부터 금 나라 사람에게 은혜와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가 금군의 병영으로 가서 실지대로 말하였다. 고라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우리 황제의 들은 바가 과연 옳았다. 급한 일이 있으면 내가 방조하겠으니 당신들은 충성과 의리를 다하여 한결 같이 왕실을 받들라!》고 부탁하고 드디어 돌아갔다. 여러 성(城) 군대들이 재차 연주를 공격하여 왔으나 현덕수가 이번에도 또 적군을 격파하다. 왕이 현담윤을 장군으로, 안북호장 노문유(安北戶長魯文 )를 합문지후(閤門祗侯)로 가임명하고 고향에 그 대로 거주하게 하였으며 현덕수는 내시 지후(內侍祗侯)로 임명하고 안북 도령 송자청, 문신로, 강우문(安北都領宋子淸文臣老姜遇文) 등에게는 관직과 상을 각기 차등 있게 주어서 모두 서울에 거주하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처음 안북에서 조위총 편에 붙었다가 후에 귀순하였기 때문이다. 현덕수가 글을 오려 지후고신(祗侯告身)을 반납하고 과거에 응시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얼마 아니 지나서 안남도호부사(安南都護副使)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정사가 청렴하고 명철하였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는 더욱 귀신을 숭상하는 것을 몹시 미워하여 금지하는 령이 심히 엄하였으므로 무당들이 그 고을에 들어가지 못 하였다. 하루는 아전이 여무(女巫)와 그의 남편을 붙잡아 왔는데 현덕수가 무당을 심문하더니 동료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이 무당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다.》라고 하였다. 동료(同僚)들이 웃으면서《여자 아니라면 어찌 남편이 있을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덕수가 무당의 옷을 벗기려 하고 보니 과연 남자였다. 이에 앞서 무당들이 사족(士族)의 집에 드나들면서 가만히 부녀들을 희롱하였으나 정조를 더럽힌 자들이 부끄러워서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한 까닭에 이르는 곳마다 음란한 추행을 마음대로 감행하여 왔는데 이에 이르러 온 고을이 현덕수의 신명에 감탄하였다. 내직으로 들어가서 도관낭중(都官郎中)으로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때에 산원동정 노극청(散員同正盧克淸)의 집이 빈곤하여 집을 팔으려 하였으나 팔리지 않던 차에 일이 있어서 외출하였는데 그의 처가 현덕수에게 은(白金) 12 근을 받고 팔았다. 그런데 노 극청이 집에 돌아 와서 현덕수에게 말하기를《내가 당초에 은 9 근으로 이 집을 사서 수년 간 거주하였다. 그러나 중축이나 보수한 일을 하지도 않고 12 근을 받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므로 본전보다 더한 나머지의 돈을 반환한다.》고 하였다. 현 덕수가 대답하기를《그대는 능히 의리(義)를 지킬 줄 아는데 나라고 못 지키겠는가?》라고 하고 받지 않으니 노 극청이 말하기를《내 평생에 의리 아닌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헐’가로 사서 고’가로 팔아 돈 벌이를 하겠는가? 만일 그대가 듣지 않으려거든 집 값을 전부 돌려 주겠으니 내 집을 반환하라》고 하였다.현 덕수는 부득이 그 돈을 받고 말하기를《내가 어찌 노 극청만 못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 그돈을 절에 희사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여 말하기를《이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을 얻어 볼 수 있구나!》라고 하였다. 후에 이부낭중으로 임명되였는데 간관(諫官)이 고하기를《국경 지대 출신자에게 그런 관직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고쳐 임명되였다가 사재 소경(司宰小卿)으로 임명되었다. 현덕수 처(妻)의 양모(養母)가 죽은 것을 친 장모라고 거짓 보고하고 복을 입은 일이 탄로되어 탄핵을 당하고 관직에서 파면 당하였다. 신종 때에 전중감(殿中監)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여러 번 승직되여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까지 올랐다가 연로 치사하고 고종 2년(1215년)에 죽었다.


출처 : [기타] (북한국역)-사회과학원



현 득 리(玄 得 利)

현득리는 고려조 때 조위총의 난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현담윤 시조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세종조 때 문고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된 현규의 셋째 아들이다.


세조 8년에 원종 공신으로 추록 되었으며, 부사직을 거쳐 전주판관을 역임한 분이다. 전주 판관으로 재직할 때 관북의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전라도 병정 700명을 인솔하여 함경도로 출전하였다. 출전하는 날에 왼 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 부인 전씨에게 주며 내 죽음을 각오하고 역적을 치러 가오. 적이 강성하니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그 때는 이 손가락을 주고 가는 바이오. 이 손가락이 혈색이 좋으면 살아 있는 것이요, 혈색이 죽으면 내가 죽은 것이니 이 손가락으로 장사를 지내시오. 라고 하며 출정하였다. 부인은 손가락을 비단에 싸서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 후 달포가 되어도 손가락이 선홍색을 잃지 않았으나 어느 날 손가락이 까맣게 죽어 있어 부인은 현득리가 전사하신 것으로 짐작하고 대성통곡하였다. 하루가 지난 후 말 울음 소리가 나는지라 나가보니 현득리가 출정할 때에 타고 간 말이 화살을 물고 달려와 있었다. 부인은 공이 전사 함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손가락을 염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판관은 함경도내 출전한 후에 대소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진 깊숙이 진격하였다. 당시 함경도민은 모두 이시애 편이기에 고립 무원한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졌다. 맨손이 된 판관에게 항복을 권고하다가 듣지 않으매 격살하고 말았다. 적도들은 판관의 의연한 죽음을 보고 『충의장군 현득리를 이곳에 매장하다. 사람들은 이곳에 우마를 놓아 밟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표목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구암 이정 선생이 후일 함경도 외직에 나가 고적기를 편찬하였는데 현득리 판관의 장열한 죽음이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판관의 부인이 천안 전씨로 처가의 인연으로 천안에 이사와 현씨의 집성촌을 이르고 있다고 천안시지에 기록하고 있다.


현득리의 실록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1462년 11월 9일 기해일)

이조(吏曹)에서 전지(傳旨)하기를, “고(故) 돈녕(敦寧) 안수산(安壽山)·고 판돈녕(判敦寧) 김구덕(金九德)·고 총제(摠制) 김오문(金五文)·전 감찰(監察) 여종경(呂宗敬)·수의 교위(修義校尉) 유자빈(柳子濱)·고 군사(郡事) 한권(韓卷)·전 판사(判事) 이첨로(李添老)·행 직장(行直長) 박원직(朴元直)·호군(護軍) 유형(柳泂)·고 호군 전인귀(全仁貴)·전 통찬(通贊) 노정행(盧定行)·사용(司勇) 만동원(萬同源)·고 학생(學生) 김처(金處)·고 목사(牧使) 김유양(金有讓)·전 군사(郡事) 양국화(楊國華), 부사직(副司直) 김효순(金孝順)·현득리(玄得利), 취라치(吹羅赤) 이지(李止)·사약(司약) 박양수(朴良守)·전 사정(司正) 이희산(李喜山)·돈용 교위(敦勇校尉) 이용수(李龍壽), 행 사정(行司正) 박지무(朴枝茂)·김희당(金熙당), 본궁(本宮) 노비 장성만(張成萬), 사노(私奴) 보림(保霖)·박비산(朴非山)·강금음동(姜今音同)·강백동(姜白同)은 원종 공신(原從功臣) 3등(三等)으로 추록(追錄)하라.”하였다.



세조실록 35권 세조 11년(1465년 3월 17일 갑자일)

전주 판관(全州判官) 현득리(玄得利)는 성품이 본시 간휼(姦譎)하였는데, 그가 문과(文科)의 국시(國試)에 부거(赴擧)할 때에 외질(外姪) 유양춘(柳陽春)과 장옥(場屋)에 들어가기를 약속하고 자신의 재주가 유양춘에게 미치지 못함을 분간하고는 먼저 종이 수십 폭(幅)을 유양춘에게 주어 권자(卷子)를 만드는데 색 (色)과 모양을 같게 하고는 현득리가 은밀히 표지(標紙)를 바꾸어, 유양춘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이미 방(榜)이 나왔는데, 현득리는 급제하였으나 유양춘는 낙제(落第)하였다. 시관(試官) 김수령(金壽寧)이 평소에 유양춘의 재주를 알았으므로, 낙권(落卷)을 찾아 유양춘이 지은 것을 얻어 보니, 글이 매우 거 칠고 졸렬하였다. 김수령이 이것을 유양춘에게 말하니 유양춘은 현득리가 판 것임을 알고 이를 밝히려고 하였으나, 유양춘이 어려서 현득리에게 양육되었으며, 그 외조모(外祖母)가 말려서 얻지 못하더니, 드디어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에게 호소하여, 노사신이 이를 아뢰니, 명하여 사헌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유양춘이 송정(訟庭)에 이르러 현득리를 면힐(面詰)하여도 조금도 가차(假借)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마침내 현득리의 홍패(紅牌)를 거두었다.



세조실록 36권 세조 11년(1465년 5월 19일 을축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현득리(玄得利)는 과거에 급제한 이름으로 가자(加資)된 고신(告身)을 함부로 받았으니, 청컨대 홍패(紅牌)의 예(例)에 의하여 거두어 태워버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1467년 2월 7일 계묘일)

처음에 전주 판관(全州判官) 현득리(玄得利)가 그 생질[外甥]인 생원(生員) 유양춘(柳陽春)과 더불어 함께 문과 회시(文科會試)에 응시하였는데, 유양춘이 거업(擧業)을 잘하였으므로 현득리가 몰래 그 권자(卷子)를 바꿔치기하여 방방(放榜)함에 미쳐서 현득리는 합격하고 유양춘은 낙제하였다. 유양춘이 이 사실을 알고 소송(訴訟)하니, 임금이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핵실하게 하여 현득리의 홍패(紅牌)를 추탈(追奪)하였다. 유양춘이 송정(訟庭)에 이르러서 현득리와 더불와 서로 힐난(詰難)하는 데 그 말이 매우 불손(不遜)하였으므로, 사헌부에서 종신(終身)토록 파거(罷擧)하기를 계청(啓請)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유양춘이 또한 상언(上言)하여 과거(科擧)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예조(禮曹)에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판서(判書) 강희맹(姜希孟)이 아뢰기를, “유양춘이 나이가 어리며 광망(狂妄)하여 대체(大體)를 알지 못한 것인데, 언어(言語)의 작은 실수로 인하여 종신토록 폐고(廢錮)시키는 것은 불가하며, 또 여러 차례나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징계하는 데 족합니다. 청컨대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양춘의 죄가 만약 경(輕)하다면 지난날의 판결이 잘못된 것이고, 만약 중(重)하다면 금일(今日)에 용서하는 것도 잘못이다.” 하고,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유양춘은 간사하고 경박(輕薄)하며, 그 재주를 믿고 교만 방자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현득리는 간사하고 음흉하여 도리(道理)에 부족하고, 유양춘은 진사(進仕)하는 것만을 탐(貪)하여 천륜(天倫)을 돌보지 않고 외삼촌(外三寸)을 관가에 소송하였으니, 비록 종신토록 감가하더라도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한 바가 못된다. 마땅히 용서하지 말아서 박행(薄行)하고 무상(無狀) 한 사람들로 하여금 징계하는 바가 있음을 알게 해야 하는데, 강희맹이 오히려 광망한 사람은 작은 실수라고 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또한 홀로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년 5월 16일 경진일)

함길도(咸吉道) 길주(吉州) 사람인 전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반역[不軌]을 모의하고, 먼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침 강효문이 진영(鎭營)을 순찰하여 본주(本州)에 이르니, 이시애가 반적(反賊)이라 성언(聲言)하고, 밤중에 몰래 강효문이 사통하는 기생 산비(山非)로 하여금 내응(內應)하게 하여, 강효문이 깊이 잠이 든 것을 엿보아 문을 열게 하고, 정병(正兵) 최자지(崔自池)로 하여금 돌입하여 찔러 죽이게 하였는데, 강효문이 몸을 빠져 뛰쳐나오므로 곧 추격하여 때려 죽이고, 그 머리를 뜰의 나무에 매달았더니, 얼마 아니 되어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 그리고 적이 또 평사(評事) 권징(權徵)과 목사(牧使) 설정신(薛丁新)·판관(判官) 박순달(朴順達)·부령 부사(富寧府使) 김익수(金益壽), 군관(軍官) 성이건(成以乾)·강석효(康碩孝)·이제(李堤)·최식(崔湜)·김수동(金壽同)·한희(韓熙)·김계남(金繼南)·강흥손(康興孫) 등을 모두 죽이고, 지인(知 印) 이극지(李克枝)를 보내어 치계(馳啓)하기를, “올량합(兀良哈) 등이 여러 번 적선(賊船)이 후라토도(厚羅土島)에 정박하였다고 고하였는데도 강효문이 묻지 아니하고, 적이 경원(慶源)과 종성(鍾城)의 공사(公私) 여사(廬舍)를 불살랐 는데도 강효문은 경원 절제사(慶源節制使) 이종현(李宗顯)의 가노(家奴)를 시켜 이를 아뢰지 않았으며, 충청도 연산(連山)에 사는 전 현감(縣監) 원맹손(元孟孫)의 가노(家奴) 고읍동(古邑同)이 수영(水營) 진무(鎭撫) 하수장(河水長) 등 40인과 함께 배에다 미곡(米穀)과 말안장[馬鞍]·쟁고(錚鼓) 등의 물건을 많이 싣고 길주(吉州)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잡히어 이르기를, ‘올적합(兀狄哈)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 도(道)의 인물(人物)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는데도, 강효문은 목사(牧使)와 판관(判官)과 함께 고읍동만 잡아다가 문초하여, 혹은 달래고 혹은 위협해서 육로(陸路)로 경유하여 온 자처럼 하고, 또 지금 한창 농사철 인데도 제진(諸鎭)의 정병(精兵)을 많이 거느리고 길주(吉州)에 이르렀으며, 정병을 뽑아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때를 당하여 협력하면 경중(京中)의 대신(大臣)과 내응(內應)하여 대사(大事)를 이룰 수 있다’ 하고, 설정신(薛丁新)·박순달(朴順達)·김익수(金益壽)와 사하북 만호(舍下北萬戶) 김정안(金正安) 등을 시 켜 각각 진병(鎭兵)을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세 차례나 상경(上京)한 것은, 절도사 강효문이 후라토도(厚羅土島)의 적과 도내(道內)의 군사(軍士)들을 거느리고 상경하고자 하여,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申叔舟)·김국광(金 國光)·노사신(盧思愼)·한계희(韓繼禧) 등에게 통서(通書)하여 약속을 정하려고 함이었는데, 글을 이들에게 다 주어서 모두 응낙(應諾)하여, 이내 돌아와서 강효문과 우후(虞侯) 정육을(鄭六乙)에게 밀보(密報)하였다.’ 하고, 또 공사(供辭)하여 이르기를, ‘강효문이 이달 초 7일에 정육을을 5진(鎭)에 보내어 제장(諸將)에게 군사를 더 뽑아 오도록 약속하고, 강효문은 바로 부절도사(副節度使) 황기곤(黃起곤)과 상응(相應)하여 경성부(鏡城府)를 출발해서 이달 초10일에 길주(吉州)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신이 군중(軍中)에서 회의(會議)하여 이미 강효문 등을 잡아 죽이고, 사직(司直) 이시합(李施合)으로 하여금 길주(吉州) 군사 20인을 거느리고 그의 무리 정육을과 경성(鏡城) 이북의 여러 진장(鎭將)을 포살(捕殺)하게 하고, 현득리(玄得利)와 고읍동(古邑同) 등을 가두어서 놓고, 친문(親問)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곧 이극지(李克枝)를 불러서 이시애의 반역한 상황을 묻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과 좌찬성(左贊成) 조석문(曹錫文)·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다시 국문하게 하니, 이극지가 이애를 몰래 돕고도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義禁府)의 옥에 가두었다. 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가 이시애한테서 부쳐온 글을 아뢰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제 정계(呈啓)한 서초(書草)와 대조하시면 아실 것이기에, 이에 속히 상달합니다.” 하였다. 이 시애는 최유의 표제(表弟)인 까닭에, 전후(前後)의 치계(馳啓)를 반드시 최유에게 통하여 주달하였다. 임금이 구치관 등과 이들을 정토(征討)할 계책을 밀의(密議)하고,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년 5월 24일 무자일)

종사관(從事官) 김순명(金順命)이 안변 향리(安邊鄕吏) 김수남(金壽男)과 내수사(內需司) 종 막동(莫同)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알현하도록 허락하였다. 김수남이 아뢰기를, “신이 영리(營吏)로서 함흥(咸興)에 이르렀더니, 신면(申면)이, 이시애가 수령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군사를 모아 미리 방어하였는데, 처음에 이시애가 함흥 사람 이중화(李仲和)를 시켜서 유향소(留鄕所)에 이문(移文)하기를, ‘신임 관찰사(觀察使) 신면(申면)은 바로 난신(亂臣) 신숙주(申叔舟)의 아들이고, 또 이 간당(姦黨)이 저렇게 군사를 징발하니, 곧 죽여야 옳다.’고 한 까닭에, 향중(鄕中)의 품관(品官)에서 노예(奴隸)에 이르기까지 함께 응하여 죽였으며, 정평 부사(定平府使) 이효석(李孝碩)도 또한 그 고을 사람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하고, 막동은 아뢰기를, “향중의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계서(啓書)를 가지고 서울에 이르는 자는 문득 가두기 때문에, 여러 차례나 치계(馳啓)하였어도 간 방향을 알 수 없으니, 이는 반드시 간신(姦臣)의 소위이다. 너는 본궁(本宮)의 종이니, 지금 가지고 가는 글을 만약 아뢸 수가 없게 되면, 몰래 내종친(內宗親)에게 부탁하여 그 글을 계달(啓達)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글은> 역시 윤자운(尹子雲)이 협박을 당하여 서명(署名)한 것과 이시애가 함흥 유향소(咸興留鄕所)에 이문(移文)한 것이었다. 그 윤자운의 글에 이르기를, “신이 이 도의 인심을 살펴보니, 봄부터 왜선(倭船)의 뜬소문이 있은 뒤로 마침내 서로 놀라고 의혹하였는데, 지금 강효문(康孝文)이 반역을 꾀하여, 이시애가 그를 죽이고 길주(吉州)에 있으면서 조정(朝廷)의 처치(處置)를 기다리고 있으며, 제읍(諸邑)의 품관(品官)들이 그 지휘(指揮)를 받아 강효문의 여당(餘黨)인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들을 죽이므로, 신이 곧 연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였으나 구처(區處)를 알지 못하고, 사람마다 모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신의 뜻도 또한 사세(事勢)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속히 종친·대신에게 특별히 명하여, 유서(諭書)를 가지고 와서 화복(禍福)을 개설(開說)하여 허물을 용서하고 위로해 안심시키며, 또 사람을 이시애에게 보내어 그 반역을 토벌한 공을 상주셔서, 한 도(道)의 백성 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고, 이시애의 이문(移文)에 이르기를, “강효문의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강효문이 황기곤(黃起곤)과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북청(北靑)을 향하여 출발하다가 이미 주살(誅殺)되었으나, 오직 황기곤만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군사를 모아 난리를 꾸밀까 염려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북청(北靑)의 유향소(留鄕所)에 이문(移文)하여 그를 추포(追捕)하게 하며, 더구나 신면(申면)도 또한 이들의 간당(姦黨)이니, 만약에 군사를 징집하는 일이 있거든 모름지기 곧 베어 없애고, 또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고을 군사들을 징집 하여 한광(閑曠)한 땅에 복병(伏兵)시키고 명령을 기다리라.” 하였다. 막동(莫同)은 임금의 잠저(潛邸) 때의 근수(根隨)이었다. 임금이 묻기를, “민심[民情]이 이시애를 충성한다고 하더냐? 어찌하여 이시애를 도와 내가 부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이처럼 많으냐?”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에 이시애의 반역한 정상을 일찍이 알았다면, 내 힘으로도 넉넉히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다만 민심이 순역(順逆)을 알지 못하고 꾀임에 빠졌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따랐을 뿐입니다. 만약 유서(諭書)를 내려서 순역(順逆)을 명확하게 알게 한다면, 그 형세는 곧 해이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곧 막동에게 의복(衣服) 등의 물건을 내려 주고, 어찰(御札)의 유서(諭書) 3통(通)을 주어서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송부하였다. 그 하나에 이르기를, “제읍(諸邑)의 관리(官吏)·군민(軍民) 등에게 유시한다. 이시애가 처음에 반적을 토벌한다고 성언(聲言)하여, 너희들이 곧이곧대로 듣고 따랐으나, 이제는 이시애가 절도사(節度使)를 사칭하여, 그 스스로 반역하였음이 명확한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한 사람도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속히 <그를> 잡아 오지 않느냐? 본도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故鄕)이므로, 내가 순행(巡幸)하려 한 지가 오래다. 이제 친정(親征)함으로 말미암아 겸하여 군민(軍民)을 순무(巡撫)할 것이니, 너희들은 이 뜻을 알고 속히 이시애를 잡아 목베아 군전(軍前)에 바치라.” 하고, 그 하나에 이르기를, “함흥(咸興) 유향소(留鄕所)에 유시한다. 이시애(李施愛)의 반역한 정상이 명백하고, 너희들을 거짓으로 속여 꾀었는데, 너희들은 무슨 까닭으로 역적을 좇아 왕명(王命)을 받은 사람을 죽였느냐? 이것은 고금의 큰 죄악아며, 천지의 귀신이 용납하지 않는 바이다. 지금 이미 귀성군(龜城君) 준(浚)을 보내어 4도의 군 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고, 나도 친히 대병(大兵)을 가지고 뒤를 따를 것인데, 아직 너희들이 협종(脅從)하고 진위(眞僞)를 알지 못하니, 만약에 대병(大兵)을 한번 가하면 옥석(玉石)이 구분(俱焚)될까 염려하여, 우선 준(浚)으로 하여금 군사를 머물러 출동하지 말고 어가(御駕)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하 고, 먼저 유서(諭書)를 보내어 이해(利害)를 효유(曉諭)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끝내 적당(賊黨)에 빠지지 말게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오히려 개오(改悟)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어 돌아오지 않으면, 내 반드시 성(城)을 함락하여 생민(生民)이 <하나도> 남음이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다시 살려고 하거든, 윤자운(尹子雲)을 속히 석방하고 이시애를 잡아서 전과(前過)를 속죄하면, 재앙을 뒤엎고 복을 이룰 것이다.” 하고, 그 하나는 글의 내용이 경저인(京邸人)이 가지고 간 글과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김수남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하였다.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년 5월 28일 임진일)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의 군관(軍官) 김백겸(金伯謙)이 길주(吉州)의 지인(知印) 이영발(李英發)과 내수사(內需司)의 종 옥산(玉山) 등을 잡아 왔다. 이영발 등이 이시애(李施愛)의 계서(啓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강효문(康孝文)이 본도의 장사(將士)와 반역을 꾀하고, 글을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申叔舟)·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에게 주어 서로 약속하기를, 「강효문이 변경(邊警)이 있다고 칭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평안도(平安道)로 향하면, 한명회(韓明澮)는 강효문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아뢰어 경중(京中)의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중로(中路)에서 모여, 군사를 들어 서울로 향하자.」고 하여, 내가 지난 3월달에 이 글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몰래 여러 곳에 부치고, 또 전건(前件)의 사의(事意)를 말하였더니, 모두 이르기를, 「네가 말 한 바 합병(合兵)의 계교는 매우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오직 한명회는 답서하기를, 「상세한 것은 현 판관(玄判官)에게 있으니,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고, 이 글을 가지고 가서 몰래 강효문에게 부치고, 아울러 대답한 바를 보고하라.」 하고는, 강효문에게 말하기를, 「대사(大事)가 성취될 만하니, 장차 후라토도(厚羅土島)에 정박한 주사(舟師)를 가지고 대군(大軍)의 뒤를 따라 도내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짓밟아 죽여서 남김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처음의 모의는 내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내가 연전(年前) 11월 11일에 상경(上京)할 때에 강효문이 나와 더불어 은밀히 이 모의를 말하였고, 평사(評事) 장말손(張末孫) 도 또한 이 모의에 참여하였으며, 오응(吳凝)과 도사(都事) 조극치(曹克治)도 강효문과 더불어 자주 만나 서로 회의(會議)하였으니, 교결(交結)한 것이 명백합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것을 근거하여 가만히 생각하니, 한명회 등이 강효문 등과 더불어 안팎으로 상응(相應)하여, 하삼도(下三道)의 수륙 제장(水陸諸將)의 병선(兵船)을 회박(回泊)시키고, 올적합(兀狄哈)에게 군사를 청하여, <강효문> 군사를 발하여 서울로 향한 뒤를 기다렸다가 그 공허(空虛)한 틈을 타서 도내에 남아 있는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이고, 마침내 사직(社稷)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강효문과 그 도당이 모사를 이루지 못하고 밑바닥까지 멸망하였으며, 병선(兵船)도 이제 또한 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응변(應變)에 대한 제사(諸事)를 마음을 다해 조치하였습니다마는, 평안도와 강원도는 본도와 경계를 연한 땅인데, 둔병(屯兵)이 진(陣)을 만들어, 성식(聲息)이 자못 시끄럽다고 하는데, 다만 어떤 군사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필시 반적의 무리들이 강효문의 죽음을 듣고,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발분(發憤)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고, 또 하삼도(下三道)의 수륙 제장(陸諸將)이 이미 주사(舟師)를 뽑아 보내어 그 허물을 가리기 어려워서, 군사를 발하여 서울로 향하는 것인가 두렵습니다. 이로 인하여 패향(沛鄕)의 군민(軍民)들이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데, 길이 막히고 멀어서 방위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신이 군민을 모아 의논하고, 1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함흥부(咸興府)에 나와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이영발 등을 불러 이시애의 반역한 정상을 불으니, 이영발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본도의 인민(人民)이 모두 이르기를, ‘이시애를 숨기고 우리는 그 어육(魚肉)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이 노하여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는데, 오히려 직언(直言)을 하지 않고 간사(姦詐)하기가 백단(百端)이므로 그 의장(衣裝)을 수색하였더니, 이시애가 절도사(節度使)라 칭하고 발급한 마문(馬文)이 있었다. 이는 대개 이시애의 반간(反間)이 되어 조정(朝廷)을 염탐하는 자이었다. 임금이 곧 참(斬)하려고 하였으나, 혹 다시 국문할 일이 있을까 하여 우선 의금부(義禁府)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내수사 종> 옥산(玉山)은 바로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종이었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파산군(巴山君) 조득림(趙得琳)에게 명하여 신문하게 하니, 옥산이 대답하기를, “이놈이 친히 이 글을 이시애한테서 받아 온 것이 아니고, 이놈이 전일에 서울에 왔다 길주(吉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만자(萬自)를 만났는데, 만자가 이 글을 주며 이르기를, ‘너는 <성상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따랐던 사람이니, 이 글을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는 상사(賞賜)를 받을 것이라.’고 한 까닭에, 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그 말이 진실이므로 명하여 주식(酒食)을 먹이고, 내수사(內需司)에 붙이었다. 김백겸(金伯謙)이 아뢰기를, “귀성군(龜城君)이 군사를 주둔시켜 놓고 발정하지 아니하고 대군(大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말하기를, “귀성(龜城)이 먼저 군사를 보내서 철령(鐵嶺)을 점거하여 지키니, 첫번째로 옳은 것이고, 형세를 관망하여 신중히 하고 급히 진격하지 않으니, 둘째로 옳은 것이고, 본궁(本宮)의 노복을 초유(招諭)하여 이시애의 반역(反逆)을 알게 하였으니, 세째로 옳은 것이다.” 하였다. 김백겸이 또 아뢰기를, “어유소(魚有沼)가 거느린 군사(軍士)는 흙비로 인하여 군장(軍裝)과 기계(器械)가 거의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백만의 무리라 하더라도 기계(器械)가 날카롭지 못하면 장차 어찌 쓰겠느냐?” 하였다.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년 5월 29일 계사일)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단천(端川)사람 박춘생(朴春生)을 잡아 보냈는데, 박춘생이 이시애의 계서(啓書)를 가지고 있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강효문(康孝文)의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사에 일컫기를,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노사신(盧思愼)·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와 더불 모반(謀反)을 밀약(密約)하고, 그 용병(用兵)하는 절차의 글은 내가 왕래하며 전달하였다.’고 하므로, 신이 이것에 근거하여 강효문의 반상(反狀)을 이달 12일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고, 신 관찰사(觀察使) 신면(申면)은 난신(亂臣) 신숙주의 아들이므로 모의에 참여하였음이 명백한 까닭에 함흥(咸興) 유향소(留鄕所)에 이문(移文)하여, 만약 신면의 반상(反狀)이 현저(顯著)하면 마땅히 군사를 모아 방비해야 한다고 하였더니, 품관(品官) 이중무(李仲茂)와 주계수(朱季粹)·윤극검(尹克儉) 등 10인이 회보(回報)하기를, ‘신면이 도리어 절도사로서 반적(反賊)이 되어 토벌하려고 남도(南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체찰사(體察使) 윤자운(尹子雲)과 함께 공모하고 우리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는 까닭에, 부득이 신면 등을 죽였다.’고 하며, 또 본부(本府)의 여수(旅帥) 이중화(李仲和)가 글을 보내기를, ‘이미 신면과 박종문(朴宗文)·구치동(丘致쪏) 등을 죽이고, 윤자운과 심원(沈湲)·손욱(孫旭)·김후(金厚) 등을 가두었으니, 모름지기 속히 계달하라.’고 하였고, 김후의 공사에 이르기를, ‘이달 16일에 신 관찰사 신면이 이문하기를, 「북도(北道)에 사변(事變)이 있으니, 남도(南道)의 제읍(諸邑)의 수령(守令)들은 경내의 군사를 점검하고, 10일분의 양식을 가지고 관문(官門)에서 거느리고 있으며 대령(待令)하라.」 하고, 17일에 또 이문하기를, 「급속히 대면하여 부탁할 공사(公事)가 있으니, 급히 달려오라. 내가 정평(定平)에 이르니, 수령(守令)으로서 기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장차 군법(軍法)에 따라 시행하겠다.」고 하여, 18일 아침에 내가 함흥부(咸興府)에 이르러 신면을 만났는데, 본부(本府)의 여수(旅帥) 장정(張淨)이 사대(射隊) 50인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렀습니다. 이날 신면이 윤자운(尹子雲)·박종문(朴宗文)·손욱(孫旭)·구치동(丘致쪏)·심원(沈湲)·이효석(李孝碩)·변처관(邊處寬)·녹사(錄事) 엄유구(嚴悠久)·강효문(康孝文)의 군관(軍官) 김중륜(金仲倫) 및 반인(伴人) 등과 더불어 관찰사(觀察使)의 청사(廳事)에 모여서 모두 갑주를 입고 밀의(密議)하고는, 이효석을 함흥 송동(松洞)에, 변처관을 함관령(咸關嶺)에 나누어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비어(備禦)하게 하였으며, 나는 배패(陪牌)와 본부의 남은 조사를 거느리고 19일에 본도의 거민(居民)을 살해하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김후가 또 공사하여 이르기를, ‘내 이 신면의 절도(節度)를 받고 군사를 오로지 관장한 것은 진실로 신면 등이 반역 모의를 한 것을 알고 참여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신은 생각건대, 심원(沈湲)과 손욱(孫旭)은 어리석고 미혹하여 신면의 모반(謀反)에 따른 것이 마땅하나, 윤자운은 대신(大臣)이니, 만약에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관여하지 않았다면, 지금 신면의 역모(逆謀)를 듣고 마땅히 극진히 놀라며, 한편으로 아뢰고 한편으로 주륙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그 말을 듣고 힘을 같이하여 반(反)하였으니, 본래부터 강효문(康孝文)의 무리가 되었음을 의심할 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박춘생(朴春生)을 불러 이시애의 반상(反狀)을 물으니, 박춘생이 아뢰기를, “처음에 이시애가 말하기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서울에서 다섯 필의 말을 타고 유서(諭書)를 받들고 왔는데, 나를 절도사(節度使)로 삼고, 내 아우 이시합(李施合)을 우후(虞侯)로 삼았다.’ 하고, 마침내 강효문 등을 죽였으며, 또 일컫기를, ‘이시합을 의금부 도사로 삼았다.’ 하고, <이시합을> 북도 (北道)에 보내어 제진(諸鎭)의 수령(守令)들을 모두 죽이게 하고, 또 사람을 갑산(甲山)과 삼수(三水)·혜산(惠山)에 보내어 절제사(節制使)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시애가 또 말하기를, ‘평안도의 군사 1천여 기(騎)가 와서 설한령(雪寒嶺)에 주둔하였다.’ 하고, 이시합으로 하여금 길주(吉州) 군사 1백 명과 단천(端川)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단천을 지키게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대군(大君)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역(金城驛)에 왔다고 시끄럽게 전하나, 이것은 대군(大君)이 아니고 반드시 중간의 초적(草賊)이 설한령(雪寒嶺)의 군사와 서로 합하여 이 길로 들어와 거민(居民)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하고, 경성(鏡城) 이북의 진(鎭)마다 활 잘 쏘는 자 1백 명씩 징발하여, 총 1천 50기(騎)를 길주(吉州)에 모아 놓고 군량을 주며 이르기를, ‘장차 함흥(咸興)에 가서 방어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정병(精兵)이 만 명은 될 만하니, 만약에 모두 징발하여 모으면 초적(草賊)을 섬멸할 수 있다.’고 하며, 이시합이 재상(宰相)의 의물(儀物)을 갖추고 우후(虞侯)라 칭하며 단천(端川)에 이르니, 품관(品官) 최자상(崔自祥)과 심경종(沈敬宗) 등이 전후(前後)의 사대(射隊)로써 교외(郊外)에서 맞이하기를 사명(使命)을 받든 사람처럼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박춘생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게 하였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2월 27일 무오일)

유생(儒生) 유양춘(柳陽春)·조정지(趙禎之)·박형문(朴衡文) 등이 상언(上言)하여 시험에 나아가기를 청하니,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유학(幼學) 박형문은 지난 정축년의 시학(視學) 때에, 원점(圓點)이 차지 못하였으므로, 그 아우 박형무(朴衡武)의 이름을 거짓 꾸며서 시험에 나아갔고, 생원(生員) 유양춘(柳陽春)은 그의 외삼촌[舅] 현득리(玄得利)가 종이 가운데에 이름을 바꾸어 넣은 것을 가지고 사헌부(司憲府)에 시험을 고발하여 상송(相訟)하였을 때, 현득리와 입술을 내밀며 서로 힐난하되 말이 심히 패만(悖慢)하여 함께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정지하였으며, 조정지(趙禎之)는 그의 할아비 조희민(趙希閔)이 불충(不忠)한 일을 한 죄(罪)가 있는 까닭으로 폐고(廢錮)하였으니, 모두 시험에 나아가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으나, 특별히 명하여 박형문(朴衡文)·유양춘(柳陽春)은 시험에 나아가기를 허락하였다. 이 앞서 유양춘은 장차 취사(取士)한다는 것을 듣고, 행궁(行宮)에 이르러 사장(辭章)을 교묘하게 꾸며, 백가지 계책으로 진취하려고 탐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에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와 모든 권세 있는 이의 장막에서 밤이 어둡도록 애걸하였고, 인연하여 상달(上達)하여서 허통(許通) 얻기를 바랐으나 뜻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이에 이르러 또 박형문 등과 상서(上書)하였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2월 28일 기미일)

집의(執義) 이극돈(李克墩)이 아뢰기를, “유양춘(柳陽春)은 어릴 때에 그의 어미의 아우인 현득리(玄得利)에게 붙여 양육되었으니, 은혜가 아비와 같은데도, 이에 장고(狀告)를 발하여 꾸짖고 욕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굴복함이 없었습니다. 그 아비가 양(羊)을 훔쳤다고 아들이 증언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유양춘은 경박한 행동을 한 사람이니, 청컨대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만약 그 재주로써 시험에 나아가기를 허락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권려하고 경계를 보이겠읍니까? 또 신 등은 듣건대 한 사람을 상(賞) 주어서 천만 인(千萬人)을 권려하고, 한 사람을 벌(罰)주어서 천만 인을 두렵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유양춘과 같은 자는 심행(心行)이 불초(不肖)하니, 허통(許通)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옛날에 진평(陳平)은 어떤 도적이 형수[嫂]에게 금(金) 누만(累萬)을 준 것이 있었는데도 고제(高帝)가 버리지 않았으니, 인주(人主)가 사람을 임용하는데 어찌 단점으로써 아울러 장점을 버리겠느냐? 그것을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세조실록 47권 세조 14년(1468년 7월 21일 무인일)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전지(傳旨)하여, 장효치(張孝治)·박연(朴淵)·김여생(金麗生)·신연수(申延壽)·장서(張瑞)·이성(李筬)·최여정(崔汝貞)·홍강(洪剛)·서정수(徐貞壽)·맹득미(孟得美)·최한신(崔漢臣)·현득리(玄得利)·김종직(金從直)·김지경(金之慶)·이봉손(李鳳孫)·윤혜(尹惠)·곽승중(郭承中)·윤효인(尹孝仁)·김적복(金積福)·최득손(崔得孫)·최효강(崔孝江)·김덕중(金德中)·김산(金山)·김지(金智)·이흔경(李欣敬)·윤만산(尹萬山)·박득만(朴得萬)·이춘(李春)·최사덕(崔思德)·곽춘우(郭春雨)·최습(崔濕)·박유량(朴有良)·최산우(崔山雨)·이영수(李永守)·문득산(文得山)·여만민(余萬民)·봉수(奉綬)·유연(柳淵)·김수생(金水生)·김숭효(金崇孝)·도계량(都繼良)·안수지(安壽祉)·왕종인(王宗仁) 등의 고신(告身)을 돌려 주도록 하였다.



성종실록 10권 성종 2년(1471년 4월 18일 경신일)

일찍이 정승을 지낸 사람과 의정부·육조·관각(館閣)의 당상관들이 정부에서 회의(會議)하여 예문록(藝文錄) 김흔(金흔) 등 15인을 간선(揀選)하여 아뢰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유양춘(柳陽春)은 일찍이 그 외삼촌[舅] 현득리(玄得利)가 자신이 지은 시권(試卷)을 도둑질한 일을 발설하였다가 좌죄(坐罪)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또한 간선(揀選)한 속에 있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극증(李克增)·겸 판서(兼判書) 노사신(盧思愼)이 말하기를, ‘유양춘이 간선한 데에 있음은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여러 재상은 듣지 않고 이르기를, ‘비록 간선한 데에 있더라도 이조(吏曹)에서 스스로 서용(픊用)하지 않을 수 있는데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비호하려는 것이었다.” 하였다.】



성종실록 10권 성종 2년(1471년 4월 23일 을축일)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 김지경(金之慶) 등이 합사(合司)하여 와서 아뢰기를, “듣건대 유양춘(柳陽春)도 또한 예문록(藝文錄)에 참여하였다 하는데, 유양춘은 일찍이 그의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와 문과 회시(文科會試)에 같이 부시(赴試)하였다가, 현득리는 시권(試卷)을 바꾸어 써서 마침내 급제하였고 유양춘은 낙방되자 노하여 장계를 내었으니, 세조(世祖)께서는 유양춘의 죄를 현득리보다 중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명하여 영구히 정거(停擧)하게 하였었으나, 뒤에 특별한 은혜를 입고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음은 이미 분수에 넘치는 것인데, 이제 또 뽑혀서 예문록(藝文錄) 가운데에 들어가게 되니, 예문관(藝文館)은 직임이 경연(經筵)과 춘추(春秋)를 겸대(兼帶)하므로 모두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조득인(趙得仁)이 학록(學錄)에 천거되었다 하여, 이조(吏曹)에서 논박하기를, ‘학록(學錄)·학정(學正)은 대성(臺省)과 같은데, 조득인은 문벌에 허물이 있어서 이 직위를 제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세종(世宗)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진덕 박사(進德博士)를 제수하라.’ 하였습니다. 학록·학정은 참외(參外)의 소직(小職)인데도 세종께서 오히려 중하게 여기셨거늘, 하물며 예문록이겠습니까?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였다.



성종실록 106권 성종 10년(1479년 7월 13일 정묘일)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채수(蔡壽) 아뢰기를, “유양춘(柳陽春)이 상언(上言)하면서 당초 좌죄(坐罪)하였을 때의 초사(招辭)를 아울러 아뢰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를 본다면 그 죄(罪)가 이와 같이 심한 것은 아니다.” 하니, 좌부승지(左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아뢰기를, “유양춘의 외조모(外祖母)가 전민(田民)을 청하였어도 듣지 않았고, 현득리(玄得利)도 전민(田民)을 청하며 말하기를, ‘너는 나이가 젊고 재주가 뛰어나니, 고과(高科)를 잃지 않을 만하나, 나는 기필할 수가 없다. 내 너와 더불어 부자(父子)와 같으니, 고발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양어 말을 주고 받으며 다투고 힐난하였으니, 타관(他官)은 가(可)하거니와 대성(臺省)과 정조(政曹)는 제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서용(敍用)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06권 성종 10년(1479년 7월 14일 무진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현(成俔)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법(法)이란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요 인주(人主)의 권병(權柄)이니, 마땅히 견수(堅守)하여서 이를 봉행(奉行)하고 엄격하게 관건(關鍵)을 세워 사람으로 하여금 절연(截然)히 범(犯)할 수 없음을 알게 한 뒤에야, 사람들이 모두 죄(罪)를 두려워하여 감히 악(惡)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혹 한 번이라도 해이해지면 요행(僥倖)을 바라는 자가 탄관(彈冠)하고서 나와 그 허물을 면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삼가 《대전(大典)》을 상고하건대, 남형(濫刑)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문서(文書)를 위조(僞造)한 자는 모두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화(金화)·송심(宋諶)은 전에 수령(守令)을 맡았을 때에 자목(字牧)의 임무를 생각하지 않고 형벌을 씀이 적중하지 아니하여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으니, 그 위엄을 방자하게 하고 법을 소홀하게 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상(金湘)은 도둑질하여 처부(妻父)의 문기(文記)를 고쳐서 처(妻) 자(字)를 고치어 첩(妾)으로 하였는데, 이는 한갓 노비(奴婢)만을 탐하여 점유하려 함이 아니고, 그 의도가 동복(同腹)을 천인(賤人)의 소생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니, 그 간사(奸詐)함을 점점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유양춘(柳陽春)과 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과명(科名)을 점유(占有)하기를 바라고, 표숙(表叔) 현득리(玄得利)의 일을 소송하여 여러 무리의 입에 퍼져 있으니, 다시 논(論)할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됨을 돌아보건대 험소하고 경박(輕薄)하여 끝내는 영장(令長)의 그릇이 못되며, 또 문장을 하는 것이 부탄(浮誕)하고 맹랑(孟浪)하여 규구(規矩)에 맞지 않습니다. 비록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왔더라도 실은 이문(吏文)을 알지 못하고 한어(漢語)를 알지 못하니, 하나도 취할 만한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무리는 전일에 모두가 이미 정죄(定罪)되었는데 이제 특별히 전지(傳旨)를 내려 혹은 금고(禁固)를 제(除)하고 혹은 서용(敍用)을 가(加)하셨습니다. 중외(中外)에서는 성상(聖上)의 인자하고 측은해 하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반드시 조정(朝廷)이 용이(容易)하게 변법(變法)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착하지 못한 것을 보거든 버리기를 끓는 물을 만지는 것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혹 사람의 착하지 못한 바를 보고도 차마 빨리 물리치지 못하고 조저(朝著) 안에 용납한다면, 비록 미천(微賤)한 세인(細人)이라 할지라도 후일(後日)의 해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결같이 《대전(大典)》을 따라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